연대작

그레이존
2024 | 43분 | 다큐 | 주현숙
2014년 4월 16일, 진도로 향한 언론인들, 신입 기자에서부터 전장을 누비던 베테랑 피디까지 그들이 이전에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참사의 현장과 그들의 선택에 대해 듣는다. 10년, 반복되는 참사를 마주하며 다시 질문한다. ‘우리는 2014년 4월 16일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내디뎠나. 우린 뭘 놓친 것인가?’

별은 알고 있다
2023 | 70분 | 다큐 | 권오연
2022년 10월 29일, 네온사인으로 반짝이던 이태원 거리는 수십 대의 불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희생자들의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서울시청 앞에는 순백의 국화꽃과 ‘이태원 사고 사망자’라고 적힌 위패만 덩그러니 놓인 이상한 분향소가 차려졌다. 애도가 아닌 망각을 조장하는 텅 빈 분향소에 저항하며 이태원 참사 가족들은 선명한 붉은 색의 목도리를 두르고 하얀 눈이 쌓인 이태원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여름이 지나 다시 겨울이 오고 있다. 그동안 어떤 시도와 변화와 좌절, 그리고 연대가 생겨났을까. 우리에게 이태원 참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인권평
2014년 4월 16일의 세월호참사, 2022년 10월 29일의 이태원참사를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는가?
- 장세현(22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집행위원)
<그레이존> : 되돌릴 수 없는 변신
‘훌륭한 언론인’은 그레이존, 즉 흑도 백도 아닌 회색지대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혼란스럽고 시끄러운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가서 객관적 사실을 뽑아내고, 중립적으로 진실을 그려내야 하기 때문이다. ‘훌륭한 언론인’은 그 무엇보다도 비당사자로서의 냉철한 판단력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그러나 참사의 현장에서 중립성, 객관성, 이성을 지키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한 일인가? 앞에 있는 사람의 절규를 바라보며 얼마나 진실한지 고민하고 분석하고 있는 사람은, 카메라 앵글을 다듬고 있는 사람은, 인간의 도리를 다하고 있는가?
영화 <그레이존>은 이 질문에 직접 맞부딪힌 이들, 세월호 침몰 소식을 듣고 진도 팽목항에 달려간 언론인들의 인터뷰를 담는다.
2014년 그날, 각자 기자, PD, 다큐멘터리 제작자 등 직업인으로서 사건 현장에 달려간 이들은 무질서과 그 속에서 너무나도 분명한 고통을 목격한다. 그럼에도 언론인들은 프로답게 ‘구조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유가족들의 말을 보도하는 것이 공신력이 있는지 망설이고, 바닷속에서 끌려나오는 시체를 보기 좋게 담기 위한 방법을 자기도 모르게 고민중이다.
죽음과 고통과 국가의 무책임함 앞에서 언론인들의 프로정신은 또다른 잔인함으로 다가온다. 어떻게 보면, 카메라가 담는 현장의 생생함은 곧 삶에서 날것의 반응을 숨길만 한 여유도 특권도 없었던 약자들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사택 울타리 속에, 경호원들 사이에, 공식문서 뒤에 스스로를 숨길 수 있는 정부, 대통령, 특권층은 언제나 카메라에 담기 더 어려웠다.
카메라를 든 감독들, 수첩을 든 기자들에게 유가족은 쓰레기를 던지고 소리지르며 내쫓으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언제나 극적인 현장, 고통, 가장 시끄러운 곳에 카메라를 대 왔다. 유가족이 아니면 카메라는 어디를 향해야 한단 말인가?
그날 이후 몇 주간, 언론인들은 가족이 죽었다는 소식을 기다리는 지옥이 된 진도체육관을 관중석에서 지켜본다. 그리고 죽음과 고통과 국가의 무책임함 앞에서 냉철한 관찰만 하는 것은 ‘행동’보다 ‘방관’에 가깝다는 생각에 분노, 자괴감, 죄책감을 마주하게 된다.
영화 <그레이존>에서 세월호 참사 이후 스스로가 변했다고 말하는 언론인들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2023년의 텅 빈 진도체육관에서 시작하며, 중간중간 4월에만 피는 벚꽃, 노란 빛을 띈 은행잎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가 이 장면들을 보며 세월호를 떠올리는 것은, 우리 모두 되돌아갈 수 없이 변했다는 걸 증명해준다.
전쟁과 학살, 참사가 일어나도 계속되는 일상에 대한 괴리감과 무기력함을 우리 모두 느낀다. 국가의 폭력과 방치를 목격한 우리는 분명 예전같지 않다. 우리가 변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자 가능성이다. 참사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무언가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무엇이 변해야할지, 돌아가지 않는 새로운 길을 어떻게 만들어나갈지 우리가 함께 고민할 차례다.
<그레이존> 속 언론인들은 변화의 방식으로 보도 대신 ‘기록’을 선택한다.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 세월호 기록팀에 들어가기도, 전재산을 들여 세월호 다큐멘터리 제작에 온 힘을 쏟기도 한다. 그리고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을 때 한 PD는 정기적으로 방송에 유가족의 목소리를 직접 내보내기도 한다.
언론인들에게 유가족이 느끼는 감정은 더 이상 배제해야할 것이 아니라, 감정 그 자체로 기록이며 증언이 되었다. 그리고 언론인에서 참사의 목격자로의 되돌릴 수 없는 변신을 담은 이 영화는 ‘일상으로의 복귀’가 아닌 ‘변화하는 존재로서의 고민’에 함께하자고 우리를 초대한다.
<별은 알고 있다> : 최소한의 정성이라도
*우리 모두 영화의 크레딧까지 꼭 보면 좋겠다. ‘20대’, ‘희생자’, ‘시민’ 같은 일반명사와 달리 이름은 그 사람의 고유함을 상상하도록 이끄는 힘이 있다. 크레딧 옆에 나오는 159명의 이태원참사 희생자들의 이름과 얼굴들을 하나하나 보며 그들이 빼앗긴 시간을 우리의 시간으로 함께 기억하면 좋겠다.
우리는 세월호참사와 이태원참사를 애도하며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해왔다. 그런데 우리는 잊지 않겠다고 말하며 무엇을 기억하는가?
영화 <별은 알고 있다>는 이태원 참사의 유가족이 서로를 찾아내고, 함께 ‘10·29 이태원 참사 피해자 권리 보장과 진상 규명 및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향해 투쟁해나가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이태원참사 희생자들의 삶이 소중했던만큼, 국가가 정성을 더 기울였어야 했다고, 앞으로의 참사를 막기 위해 최소한의 정성이라도 보이라고 요구하는 유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유가족은 단순히 ‘참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말한다. 각 희생자의 위패와 영정사진이 있는 분향소, 대통령의 사과, 진상규명, 참사 재발 방지가 필요하다는 당연한 사회적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떤 변화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왜 애도가 투쟁으로 이어져야 하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들은 이렇게 답한다.
“책임자 처벌해서 너네가 얻는 게 뭐냐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안전사회입니다.”
이태원 참사 이후 국가는 보여주기식으로 밀집된 장소에 대한 경각심을 심으려 하고, 지하철 등의 장소에 인파 분산을 위한 인력을 배치했다. 그러나 유가족이 말하는 안전사회는 참사가 일어났을 때 국가가 ‘국민들의 부주의로 인한 사고’라며 주의를 돌리지 않고, 재발 방지를 위한 책임을 지는 사회이다.
이태원 참사는 국민들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한 국가의 잘못으로 기억되어야 하며, 국가가 책임을 다할 때까지 이태원 참사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유가족의 결의는 죽어서 별이 된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약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