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미디어, 교육
감독 장주희 | 2022 | 극 | 23분 23초 | 기획 어깨너머 | 제작 어깨너머, 원주장애인자립생활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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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미디어강사 성필은 원주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영상제작기초‘ 수업을 시작한다. 성필은 차별 없는 미디어교육을 목표로 차근차근 수업을 이어가지만 무슨 이유인지 장애인 수강생들은 미디어수업에 불만을,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다. 풀샷(Full Shot)은 왜 ’서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설명할까? 니샷(Knee shot)에 ’니‘는 뭘까? 아니 그런데 삼각대 다리는 왜 이렇게 얇지? 복잡한 촬영장비와 어려운 영상용어, 미디어 강사가 의도하지 않은 이 차별을 비장애인 미디어 강사와 장애인 수강생들은 어떻게 함께 해결해 나갈 수 있을까
인권평
스크린 바깥으로 확장되는 투쟁의 결의 <장애인, 미디어, 교육>
- 하민지 (비마이너 기자, 옥바라지선교센터 운영위원장, 21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집행위원)
*장애인인권영화란 무엇인가?
영화란 무엇인가. 내로라하는 수많은 학자와 감독이 이 질문에 답해 왔다. 가장 기억에 남는 답은 “아무것도 아니다”이다. 지난해 9월 타계한 프랑스 영화감독 장 뤽 고다르가 한 말이다. 그는 1997년, 50돌을 맞은 칸 영화제 기자회견에서 이 같이 말했다. 인터뷰 전문을 보면 조금 더 길게 대답했다.
“영화란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영화는 무엇을 원하는가. 모든 걸 원한다. 영화는 무엇을 할 수 있나. 뭔가를 할 수 있다. 영화는 프랑스 혁명 당시 평민계급의 처지와 비슷하다. 평민계급과 영화 모두 사회 속에서 위치가 급속히 높아졌으나 자기 자리를 정확히 찾지 못했다. 정치적 힘이란 측면에서 특히 그렇다. 그러나 둘 다 앞으로 뭔가를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한겨레, 이성욱 기자, ‘누벨바그 선봉장 장 뤼크 고다르 감독 / ‘영화란 아무것도 아니다’’, 1997년 5월 12일)
답변 전체를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은 영화를 무시한 언사가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영화는 뭐든 될 수 있다’는 뜻에 가깝다. 실제로 고다르 감독은 현대영화의 시초라 불릴 만큼 여러 혁신적 시도로 1950년대 프랑스 누벨바그(새로운 물결) 사조를 이끌었다. 1968년 5월 혁명 이후부터는 정치적이고 혁명적인 메시지를 영화에 담기 시작했다. 뭐든 될 수 있고, 뭔가 할 수 있는, ‘영화’로 이야기하기 위해 죽기 전까지 비디오 실험에 몰두했다.
장애인인권영화란 무엇인가. 올해 21돌을 맞은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는 매해 장애인인권영화를 기다린다. 선정작을 심사할 때 중요하게 보는 건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장애인인권에 관한 메시지가 혁명적인가. 둘째, 영화적 순간을 체험할 수 있는가.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하는 작품은 드물다. 그러다 장주희 감독의 <장애인, 미디어, 교육>을 보게 됐고 심사평에 이렇게 썼다. “이 작품이 선정되지 않는다면 마로니에공원에서 무기한 농성을 하겠다.”
장애인인권영화가 뭐냐고 묻는다면 이번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한 <장애인, 미디어, 교육>이라 답하겠다. 앞서 말한 두 가지가 모두 충족된 것은 물론이고, 컷과 컷이 부딪는 지점에서 메시지의 힘이 더욱 극대화된다. 영화적 순간이 현란한 기교로서만 기능하지 않는단 뜻이다. 관객을 몰입하게 하고 즐겁게 하는 장치들이 차별에 맞서 싸우는 장애인 당사자의 위력을 드러낼 용도로 사용됐다. 장애인 당사자가 배우로 등장해 연기하며, 카메라가 투쟁 현장 한가운데에 있었던 것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장애인은 뭐든 될 수 있다
강원도 원주시에 있는 반딧불장애인야학. 미디어강사가 ‘영상제작기초’ 수업을 진행한다. 카메라 사용법과 종류를 설명하는데 용어가 너무 어렵다. DSLR, 캠코더, 감도, 노출, 셔터스피드 등. 삼각대 설치도 해보지만 잘 되지 않고, 설치된 삼각대는 휠체어 이용 장애인에겐 너무 높다.
비장애인 중심 교육은 쇼트사이즈를 배울 때 정점을 찍는다. CLOSE UP, BUST, KNEE, FULL… 한 학생이 영어 말고 다른 걸로 써달라고 요청하자 강사는 칠판에 이렇게 적는다. “클로즈업, 바스트, 니샷, 풀샷… 됐죠?” 강사의 말을 들은 한 학생이 질문한다. “선생님, 풀삽이 뭐예요?” 강의 중간에 한 학생이 자신의 휴대전화로 옆 사람의 모습을 찍는다. 비장애인 중심 교육을 혼이라도 내듯 ‘찰칵’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린다.
강사는 학생이 한글공부하는 노트에 알파벳으로 쓰게 한다. “케이, 엔, 이, 이, KNEE, 니…” 학생은 강사에게 “저 당구 삼구 쳐요”라며 휴대전화 앨범을 보여준다. 휴대전화에는 학생이 찍은 나들이 사진과 영상이 가득하다. 강사가 말한다. “이게 풀샷이에요!” 학생이 대답한다. “풀삽이 뭐예요?”
비장애인 중심 사회는 장애인의 욕구와 필요를 고려하지 않는다. 교육 체계에서 배제돼 중년이 넘어서야 한글을 배운다. 손을 사용하기 어려운 장애인에게는 아무리 좋은 카메라가 있어도 자신의 휴대전화 카메라만 못하다. 그러나 장애인은 비장애인보다 열등한 사람이 아니다. 풀샷이란 용어는 모르지만 아름다운 자연 배경과 친구의 모습을 함께 찍을 땐 멀리서 찍어야 한다는 걸 안다.
풀삽인지 풀샷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장애인은 장애인의 방식과 속도로 이미 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뭐든 할 수 있다. 장애인야학의 영상제작 수업 씬은 이 같은 메시지를 밝고 재밌게 그린다.
*장애인은 모든 걸 원한다
장애인야학 수업에서 그려진 비장애인 중심 사회는 교실 바깥으로 확장된다. 쉬는 시간, 휠체어를 이용하는 학생이 삼각대 위에 높게 매달린 카메라 렌즈를 쳐다본다. 로우앵글로 찍힌 렌즈는 노려보듯 그를 내려다본다. 그는 비슷한 카메라를 본 양 기억을 더듬는다. 기억은 지난해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투쟁 현장에 닿는다. 학생은 경찰의 채증카메라를 떠올린다. 학생의 얼굴에 채증카메라가 오버랩된다.
이후 등장하는 JTBC ‘썰전라이브’ 시청 씬은 이 작품의 백미다. 수업이 재미없었던 학생들은 강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스크린을 내리고 썰전라이브를 단체 관람한다. 지난해 4월 13일,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와 이준석 국민의힘 전 대표의 토론회 방영분이다. 강사가 들어와서 묻는다. “뭐 보세요?” 한 학생이 대답한다. “영화 보고 있어요.”
썰전라이브가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차별받는 장애인들이 함께 볼 땐 영화였다. 정확히는, 함께 보고 분노하면서 영화적 순간을 만들고 있었다.
장 뤽 고다르의 말을 다시 떠올려 보자. 고다르의 말과 썰전라이브 시청 씬을 이렇게 연결해 보면 어떨까. 영화는 뭐든 될 수 있다. 썰전라이브를 함께 보며 함께 분노하는 장애인은 뭐든 될 수 있다. 영화는 모든 걸 원한다. 함께 분노하는 장애인은 모든 걸 원한다. 영화는 뭔가를 할 수 있다. 함께 분노하는 장애인은 뭔가를 할 수 있다. 즉, 썰전라이브 자체가 아니라 함께 시청하며 투쟁의 결의를 다지는 순간이 영화인 것이다. 그래서 영화 보고 있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썰전라이브 토론 장면과 지난해 420 투쟁 현장이 계속 교차편집 된다. 썰전라이브를 보며 시큰둥하거나 열 받는 표정을 지은 장애인의 얼굴은 420 투쟁 현장에서 경찰 방패에 둘러싸인 채 굳게 싸우는 얼굴로 이어진다. 썰전라이브를 보고 있는 야학학생 모두 투쟁 현장 속에도 있었던 것이다. 다큐멘터리 같은 실사와 극영화 속 연출된 썰전라이브 시청 씬이 왔다갔다 하면서 영화는 리얼리티를 획득한다. ‘열차가 어둠을 헤치고’라는 이번 영화제 슬로건처럼, 영화 속 분노가 스크린 바깥으로 나아가며 관객은 놀라운 영화적 순간과 투쟁의 결의를 체험하게 된다.
썰전라이브 속 이 전 대표는 “이동권 시위를 왜 지하철에서 하느냐”, “이동권 시위가 아니라 탈시설 시위라고 해라” 등의 망언을 쏟아낸다. 장애인은 이동권도 원하고 탈시설도 원한다. 비장애인이 누리는 모든 걸 원하기 때문에 투쟁한다. 투쟁하는 장애인이 휴대전화 메모장에 천천히 쓴다. “이준석 나쁜 놈 샷.” 그는 이렇게 적고 재밌다는 듯 키득키득 웃는다.
*장애인의 카메라는 뭔가를 할 수 있다
강사가 썰전라이브 영상을 일시정지 하고 말한다. “영상용어는 약속이에요. 이게 바스트샷이에요.” 잘 보고 있던 ‘영화’를 끊자, 학생들이 항의한다. 어려워서 수업 못 듣겠다고 집에 가겠다고 한다. 장애인콜택시가 갑자기 빨리 잡혀서 어쩔 수 없이 일찍 간다는 사람도 있다. 손을 사용하기 어려운 휠체어 이용 장애인이 무릎 위 방석에 카메라를 올려놓고 말한다. “이게 니샷이에요. 무릎으로 찍는 샷, 니샷!”
영화는 이렇게 끝난다. 투쟁하는 장애인의 휴대전화 카메라, 무릎 위에 있는 ‘니샷’ 카메라는 무엇을 찍게 될까. 썰전라이브를 보고 함께 분노했으니 아마 투쟁현장의 풍경을 찍지 않을까. 이 전 대표는 투쟁현장에 오질 않으니 이준석 나쁜 놈 샷은 못 찍을 것 같다. 싸울 때 뜨거운 동지 샷, 폭력경찰 물러가라 샷, 혐오발언하는 시민 싫어 샷 같은 것이 카메라에 담길 것이다. 이 같은 추측이 가능한 것은 영화가 야학교실에서 투쟁현장으로 이야기를 매끄럽게 확장했기 때문이다.
‘장애인인권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표준이 될 작품
<장애인, 미디어, 교육>은 연출과 실사를 넘나들며 비장애인 중심 사회를 은유했고, 투쟁현장 한복판에서 투쟁하는 장애인의 면면을 오롯이 담았다. 영화 속 투쟁의 결의를 스크린 바깥까지 확장하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영화적 순간을 나타낸 연출, 호흡이 빠르지만 잘 정돈된 교차편집 등 다양한 기법으로 혁명적인 메시지를 잘 살렸다. ‘장애인인권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표준이 될 작품이다. 이 같은 수작을 영화제에 모실 수 있어 영광이다. 이 작품의 인권평을 내가 쓰게 된 것도 영광이다.
느린걸음
감독 김해빈 | 2021 | 극 |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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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발달 장애 3급인 판정을 받은 아들 도현을 키우고 있는 선화와 민재. 장애 판정을 받은 지 좀 됐지만 장애인 등록은 하지 않았다. 진전이 되지 않는 도현의 상태. 그리고늘어만 가는 도현의 치료비에 빠듯해지는 생활. 선화는 도현의 치료와 지원비를 위해 장애인 등록 및 바우처 신청을 하기 바라지만 장애인에 대한 차별에 대한 걱정을 하는 민재는 이를 반대한다.
인권평
장애등록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 차별이 없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유지영 20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프로그램위원
부부는 발달장애 판정을 받은 자녀를 두고 있다. 이들은 자녀의 교육비 때문에 생활에 허덕이면서도 혹여나 아이가 장애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될까봐 장애인 등록을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 장애인으로 등록하면 교육비가 대부분 지원된다는데 그거 그냥 하면 안 될까? 장애 등록하지 말고 내가 주말까지 일해서 생활비는 더 벌면 되잖아. 부부 사이에는 어느덧 커다란 견해차가 생긴다.
16분 30초 분량으로 길이가 짧은 영화 ‘느린 걸음’에는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장애가 있는 어린 자녀를 둔 부부의 현실이 잘 드러난다. 젊은 부부는 모든 게 처음이어서인지 아이 앞에서도 자주 무너지는 모습을 드러낸다. 발달장애 자녀의 돌봄을 부부라는 개인이 오롯이 책임져야 하는 현실은 가혹하기만 하다. 영화는 아득한 현실을 눈앞에 두고 희망이나 화해를 말하지 않는다. 관객들은 이들 부부의 갈등이 쉽게 해결되는 모습을 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애등록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 차별이 없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차별을 만드는 건 장애등록 그 자체가 아닌 사회다. 영화가 그 점을 짚지 않은 것은 다소 아쉽다. 영화는 부부가 처한 현실을 사회가 아닌 개인의 영역으로 자주 끌고 들어간다. 부부는 자주 무너져서 울고 차별로 인해 장애등록이 단순히 ‘선택’이 아닌 갈등의 요소가 된다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영화는 거기서 그친다.
그렇기에 더욱 영화 ‘느린 걸음’ 밖으로 시선을 확장해봄 직하다. 이 영화를 보고난 뒤 관객들이 나눌 말이 풍성해지기를 기대한다.
밤이 깊었습니다
감독 양준서 | 2021 | 극 |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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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사무실에서 물건이 사라지면서, 극은 시작이 된다. 각자의 알리바이를 이야기하며 마피아를 찾아내기 시작하는데, ‘마피아’라는 게임은 선량한 시민을 죽이는 마피아를 찾아내는 엄청난 심리전이 필요한 게임이다. 현실에서의 ‘마피아’는 총이 아닌 그 어떤 편견의 말과 생각들로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를 또는 무엇을 편견을 가지고 보고 있지는 않은지? 또 이 편견이 차별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단순히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장애인이 비장애인을 차별하는 내용으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 사람이 사는 곳에서 우리도 모르게 생기는 편견들, 사람을 볼 때 진짜 그 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편견으로 가득찬 눈이 아닌 그 사람 자체를 볼 수 있는 눈...
그런 눈이 있다면, 우리 모두는 함께 잘 더불어 살 수 있다.
인권평
‘여우와 두루미’에 이어 두 번째 작품
-김상희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 20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프로그램위원
이야기 시작은 사무실에 활동가들의 물건이 없어지면서 한 명 한 명 탐문하며 진행된다. 정황상 사무실 내 아는 사람 소행이라고 여기며 서로를 의심하면서 마치 마피아 게임하듯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용의선상에 올려놓기 시작한다.
하지만 높은 곳에 놓여진 물건이 없어졌다는 이유로 사무실에서 유일한 비장애 활동가였던 주식씨에게 자꾸만 눈길이 간다. 주식씨를 제외하고 모두 전동휠체어 사용자인 장애인 활동가들은 높은 곳에 손이 닿지 않을 것이란 생각으로 그들은 서로의 장애 상태를 잘 안다고 생각해 용의선상에서 제외된다. 여기서 첫 번째 편견이 시작되었다. 같은 유형의 장애를 가졌어도 장애 정도가 너무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장애에 대해 묻지도 않고 쉽게 단정지어 버렸다. 그리고 장애중심적인 사무실에서 한 명의 비장애인인 주식씨는 용의자에서 범인으로 몰고 가며 빠르게 판단되어 갔다. 그 판단은 비장애 중심의 사회가 그랬듯 다른 이유 같은 건 없는 것처럼 눈 앞에 보이는 현상만 보며 장애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이어지는 것과 같아 보았다.
이 영화를 보며 우리는 얼마나 습득관념으로 다른 사람을 편견으로 바라고 있는지 점검해 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장애와 비장애 뿐만 아니라 장애와 장애 사이에도 수많은 빈공간이 존재하며 전부를 알지 못하듯 익숙한 편견의 늪에서 언제나 긴장을 해야 한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 반전이 있듯이 비장애중심의 사회도 반전이 일어나 편견이 무용지물 되는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
느릿느릿 달팽이 라디오
감독 양동준 | 2019 | 다큐 | 21분 | 기획·제작 양동준, 광주시청자미디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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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라디오를 통해 직접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독립영화 감독, 전직 버스기사, 발레리나, 헬스키퍼 등등 직업은 다양하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이라는 것. 빛보다는 어둠이 익숙한 그들에게도 그 누구보다 빛나던 순간이 있었고 현재도 자신만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이다. 과연 그들은 라디오제작을 할 수 있을까?
기획의도
때때로 우리는 자기 자신을 한계에 가둔 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자신의 관점에서 가능과 불가능을 나누고 상대의 가능성마저 평가하기 마련이다. 또한 우리 주변에는 몸은 건강하지만 마음의 장애를 가진 이들이 많다. 이와는 반대로 몸은 다소 불편하더라도 마음만은 건강한 사람들도 있다.
각자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사고’를 통해 시각장애인이 되어 서로 만나게 되었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라디오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라디오를 만드는 과정은 쉽지않지만 쉽게 포기하지않는다.
지나간 바람은 더 이상 차갑지 않듯이 빛보다 어둠이 익숙하고 역경 뒤에 더욱 단단해진 그들의 모습을 통해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은 무의미하며 우리 모두 넓은 우주 속에서 ‘같이’ 살아가는 ‘가치’있는 존재임을 깨닫길 바란다.
또한 그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소통의 방법을 이해하고 소수의 삶을 다수가 공감하였으면 한다.
인권평
-조한진희 | 다른몸들
<느릿느릿달팽이라디오>는 각자의 하루가 라디오 제작 과정으로 연결되면서, 일상을 편안하면서도 제법 밀도 있게 다루고 있다.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들이 모여 일상의 투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중도시각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하여, 각자의 일상 이야기로 시작한다. 비장애인, 정안인 중심 사회에서 시각장애인으로서 어떤 불편함을 겪는지, 그러니까 어떤 차별을 겪는지에 대해 편안하고 차분하게 접근한다.
우리가 차별을 변혁시키는 다양한 투쟁 방법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서로의 삶을 잘 알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에겐 평범한 일상인 거리를 걷고, 영화를 보고, 노동하는 과정이 다른 누군가에겐 상당한 어려움과 걸림돌을 넘어서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러니까 그들의 불편함을 알게 되고 감정이입 하는 과정이 곧 그 현실에 연루되는 과정이다. 구체성 없는 막연한 집단으로 인식되던 존재에서 개인의 존재가 보이기 시작할 때. 즉, 개개인들이 겪는 기쁨과 슬픔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누군가를 ‘타자화’하기 점점 어려워진다.
수련회 가는 날
감독 고가림 | 2018 | 극 | 21분 | 기획·제작 고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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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자매인 지윤과 소윤은 초등학교 4학년이다. 지윤은 지적장애가 있는 언니 소윤을 항상 옆에서 보살펴야 한다. 어느 날, 지윤은 수련회 통지서를 받고 언니 소윤과 함께가 아닌 혼자 수련회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기획의도
지적 장애가 있는 언니 소윤을 보살펴야 하는 지윤이는 생애 처음인 수련회에 가고 싶다. 하지만 사실 지윤이는 수련회 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반 친구들에겐 당연한 수련회 참석이 왜 지윤에게는 어려운 걸까? 지윤과 소윤이 그 나이에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인권평
-장혜영 | 심사위원
지윤은 지적장애를 가진 언니 소윤의 그림자다. 두 자매의 아침 풍경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영화속에서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어머니는 일이 바빠 집을 자주 비우는 듯하다. 아버지는 목소리로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지윤은 혼자서 익숙하게 언니를 깨우고 씻기고 밥을 차려 먹인다. 초등학생인 자매는 함께 학교에 간다. 학교에서도 소윤의 상태를 살피고 교실의 리듬에 소윤을 맞추려 노력하는 것은 오직 동생 지윤이다. 책상 밑에 들어간 언니를 데리고 나오려다 책상이 넘어지는 것을 보아도 담임선생은 자매를 돕거나 다른 급우들이 자매들과 책상을 일으켜세우도록 가르치지 않는다. 선생님은 그저 아이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며 동생 지윤에게 ‘알아서 상황을 수습할’ 시간을 준다. 고학년이 되며 새롭게 받아든 수련회 통지서는 지윤이 내면에 오랫동안 간직되어온 욕망을 바깥으로 드러내는 중요한 계기이다. 잠시라도 좋으니 언니를 돌보는 일상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소윤의 동생’이 아니라 온전한 ‘지윤’으로서 다른 사람과 관계하고 싶다는 욕망. 그 욕망은 ‘소윤의 동생’이 아니라 지윤에게 말을 거는 같은 반 남자아이 현우의 존재로 더욱 명확해진다. 지윤은 담임선생에게 부탁한다. “선생님이 엄마한테 수련회에 저만 갈 수 있다고, 언니는 못 간다고 말해주세요.” 지윤은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요청일 경우 어머니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임을 잘 안다. 지윤이 수련회에 가고싶은 마음은 주위의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혼자’ 가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만 지윤은 언니를 돌보아야 하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영화는 지윤의 내적 갈등을 생생하게 그린다. 화면 너머로 짙게 다가오는 주된 감정은 지윤의 갑갑함이다. 지윤에게는 지윤으로서 살아갈 자유가 없다. 지윤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무엇일까? 언니 소윤일까? 만일 그렇다면 이는 지나치게 손쉬운 대답임을 넘어 비겁한 책임전가일 것이다. 자매의 담임은 ‘똑똑하고 야무지’다는 이유로 동생 지윤에게 ‘문제 생기지 않도록’ ‘책임지고’ 소윤을 신경쓸 것을 요구한다. 그는 그 순간 선생으로서,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포기함과 동시에 자신보다 더 연약한 존재에게 그 책임을 교묘히 전가한다. 그에 비하면 내적 갈등으로 흔들리는 지윤은 너무나 인간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으로 살아가고자 발버둥치는 지윤 만큼이나 소윤 또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려 발버둥치는 존재라는 점은 과연 얼마나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는가? 나는 알고 싶다. 소윤은 수련회에 가고 싶었을까? 혹은 가고 싶지 않았을까? 영화는 행위하고 욕망하는 주체로서의 소윤의 마음을 너무 조금 보여준다. 욕망은 인물에게 생동감을 불어넣는 원천이다. 설령 영화 속에서 그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소윤의 욕망이 향하는 방향을 보여주는 것은 가능하다. 늘 동생을 필요로하는 존재로서의 소윤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소윤의 마음은 어디를 향해 날아가고 있을까? 그것은 그저 ‘알 수 없는 것’일까? 소윤의 마음을 20분이 조금 넘는 영화의 세계가 충분히 보여줄 수 없다 해도 화면 밖의 나는 묻고 또 물을 수밖에 없다. 영화는 지윤의 자기자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과 소윤의 존재가 공존하는 길을 모색하지 않지만, 나는 수련회에서 돌아온 현우가 지윤이 자신의 세계로 들어오기를 마냥 기다리는 것을 그만두고 스스로 두 자매의 세계로 힘껏 뛰어들어갈 수 있는 용기를 내기 바란다. 담임선생님이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행동에 후회와 죄책감을 느끼고 변화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매의 어머니가, 아직 살아있기를 바라는 그 아버지가, 자매의 이웃들이, 그 마을 사람들이 변화하기를 바란다. 우리에게는 분명 다른 선택이 가능하다. 늘 그렇다. 그것을 볼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말이다.
낙서
감독 박예원 | 2018 | 극 | 19분 | 기획·제작 박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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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바쁜 엄마를 대신해 지적장애를 가진 동생 ‘민재’의 등하교를 책임지던 초등학교 3학년 ‘유진’은 엄마가 늦는 날이면 민재를 집으로 데려와 돌보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날, 유진의 새로운 친구 ‘희영’이 아끼는 물고기를 가지고 유진의 집에 놀러오게 되는데, 호감의 표시로 민재가 희영 의 머리카락을 잡고, 놀란 희영이 뒷걸음치다 어항을 엎어 물고기가 죽고 만다. 다음 날, 유진은 희영에게 사과를 해보지만 관계는 회복되지 않고 오히려 더 악화시키게 된다. 하교 시간이 가까워지고, 희영과의 화해를 시도하려던 유진은 화장실에서 자신의 동생 민재의 장애를 겨냥한 낙서를 발견하게 된다.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민재와 그를 동생으로 둔 자신이 그들에겐 다르고 ‘틀린’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 유진은 방과 후, 아이들이 놀고 있는 놀이터 앞 에 도착한 민재를 데리러 나가는 것을 망설인다.
인권평
-박성준 | 심사위원
영화내용을 간략히 보면, 유진(주인공)이는 화장실에 갔다가 벽에 쓰인 ‘임유진 동생 장애인’이라는 낙서를 보게 된다. 그 이후 유진이는 동생 민재를 데리러 나가는 것을 망설이게 된다. 유진이는 장애인 동생과 함께 있는 모습을 누가 볼까 조심스럽다. 하지만 결국 동생 민재가 내민 손가락을 꼭 부여잡게 된다. 가족이기에. 운명이기에. 장애인이라는 낙서에 장애인가족은 상처를 받는다. 내가 장애인이 아니지만 내 가족을 욕하는 것은 나를 욕하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장애인이라는 용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크기에 장애인이라는 단어를 가족은 더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우리사회가 장애인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형성해 주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부터 장애인권교육을 실시하여 장애에 대한 올 바른 인식을 심어주어야 할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마음이 무겁다. 예전부터 장애인 돌봄은 가족의 책임이었다. 지금은 달라진 것이 있는가? 많은 장애인단체들이 광화문에서 5년간 농성하며 주장했던 것은 이제는 장애인 돌봄의 책임을 국가가 지라고 하는 것이다. 부양의무제 폐지를 통해 가족의 부담을 없애거나 경감시켜 달라는 것이다. 4월초 발달장애인 어머니들이 청와대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하며 요구하고 있 다. ‘발달장애인 국가책임제 실현하라.’
바위
감독 원유 | 2019 | 극 | 11분 | 기획·제작 원유, 김정혜, 임현철
- 배리어프리 ⭕
시놉시스
다혜는 자신의 비밀을 숨긴 채, 극단 오디션에 참가한다.
기획의도
같지만 다르게 보는 것. 그럼에도 용기를 잃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인권평
고운 | 서울인권영화제
흔히 장애예술인의 삶은 ‘극복’ 혹은 ‘치유’의 서사로 풀어지곤 한다. 이런 서사에서 장애예술인에게 장애란 ‘정상’적인 예술활동을 가로막는 거대한 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거대한 벽을 극복하고 진정한 예술가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혹은 예술을 통해 장애 예술인의 장애를, 혹은 그 장애로 생긴 상처를 치유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서사는 예술을 비장애인의 역으로 상정하고 장애인은 그러한 역을 일부 체험할 수 있을 뿐이라는 왜곡된 시선을 담고 있다.
창작의 역뿐만 아니라 창작물을 마주하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배리어프리’는 종종 비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창작물을 장애인도 감상할 수 있게 하는, 편의를 위한 ‘서비스’로만 치부되곤 한다. 그러나 묻고 싶다. 왜 장애는 극복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왜 장애는 상처를 전제하고 치유의 대상으로 삼는가? 문화예술에서 왜 누군가는 주체가 되고 누군가는 수혜자가 되어야 하는가?
영화 <바위>에서 펴지지 않는 손으로 오디션을 보는 다혜에게 심사위원은 묻는다. “손이 ‘불편’해요?” 다혜는 이 질문을 바꿔 다시 묻는다. “이게 그렇게 ‘불편’한가요?” 불편한 사람은 다혜가 아니라, 다혜의 장애를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는 심사위원들이다. 장애를 장애라고 말하지 않고, 아예 없는 존재로 가려버리려 하는 이들에게 다혜는 자신만의 가위바위보로 주먹을 내민다. 예술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질문을 던지고 도전하며, 세상을 사유하고 자신을 표현한다. 이때 예술가의 정체성은 창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장애예술인에게 장애란 그 정체성 중 하나일 수 있다. 예술활동을 가로막는 장벽이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당연한, 고유한 정체성인 것이다. 장애예술인의 문화예술활동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고 파동이 될 수 있길 바라며, <바위>의 다혜가 가위바위보로 던진 질문에 관객들이 각자의 답을 내어보면 어떨까?
우리의 연극을 쓰다
감독 김수빈, 신가율, 윤단비 | 2020 | 극 | 27분 | 기획·제작 김수빈, 신가율, 윤단비
- 배리어프리 ⭕
시놉시스
무대 위에서 연극이 펼쳐진다. 관객의 뜨거운 박수와 환호 소리로 연극을 성공적으로 마친 배우 서영, 승윤과 연극 작가 우리.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이들에게 잡지사 기자인 승윤의 친구가 다가온다. 우리의 이야기를 기사로 담고 싶다는 요청이었고 우리는 기분 좋게 승낙한다. 몇 주 후, 우리에게 기사 초안이 도착한다.
“장애를 극복한 연극 작가” “우리씨는 시각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멋진 연극작가가 될 수 있음을 몸소 선보였다.” “앞으로도 많은 장애인들이 현실 앞에 주저하지 말고 우리씨처럼 용기를 내 꿈을 이루길 바란다.”
승윤과 서영은 기사를 장난스럽게 읽으며 좋아한다. 하지만 우리의 표정은 마냥 밝지만은 않다. 승윤은 수정할 부분이 있으면 저녁까지 말해달라는 친구의 요청을 우리에게 전한다. 우리는 그날 밤 서영에게 전화해 그 기사에 불편함을 느꼈음을 말하며 고민을 토로한다. 서영은 이를 승윤에게 전했지만, 승윤은 우리가 전한 말에 공감하지 못하며 화를 낸다.
다음날 학교에서 마주친 승윤과 우리 사이에 알 수 없는 벽이 생긴 듯하다.
“글쎄 난 네가 이해가 잘 안 돼서, 이해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네.”
우리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풀려고 하지만, 승윤은 우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과거 회상) 영화는 우리, 승윤, 서영이 처음으로 만난 과정부터 연극을 시작하기 하루 전까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연극이라는 꿈을 갖고 만난 3명의 친구. 그리고 각자 고민거리를 가지고 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연극을 하며 즐거워했던 3명을 보여준다. 서영과 승윤이 자신의 진로와 부모님의 반대로 인해 고민하고 있다면, 서영은 자신의 꿈을 펼쳐나가기에 어려운 사회적 환경과 편견적 시선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우리는 연극을 준비하기 위해서 자료를 찾아 읽고 싶었지만, 다수의 출판사에서는 따로 전자 파일을 제공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이 연출한 연극에서 모두가 바쁘게 준비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소외되는 느낌을 져버릴 수 없었다.
다시 현재. 우리는 결심한 듯 승윤을 찾아가 화난 이유를 묻고, 승윤은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구냐며 우리를 나무란다.
"난 그냥 작가로 성공하고 싶은 거지, 시각장애인 작가, 장애를 극복한 작가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야.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나 장애 극복한 적 없어."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 우리.
우리의 속마음을 듣고 반성하게 된 승윤과 서영은 우리의 집에 찾아간다. 서로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세 사람은 다시 예전 같은 친구 사이로 돌아온다.
학내 방송국에서 인터뷰하게 된 승윤, 서영, 우리. 승윤은 배우로서의 길로 앞으로 계속 전진할 것을, 서영은 배우의 꿈을 포기하지만 이번 연극이 충분히 값진 경험이었음을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냥 '글 잘 쓰는 작가'가 되고 싶은 바람을 이야기한다.
기획의도
<우리의 연극을 쓰다>는 시각 장애인 우리가 '연극'이라는 자신의 꿈을 이어나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우리가 자신의 연극을 펼치기까지의 어려움과 시각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담고자 했다. 장애’를 소재로 한 영화들에서는 장애인들이 자신의 장애를 극복해서 ‘인간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감동을 유발한다. 언론에서도 장애를 극복했다는 표현을 일삼는다. 하지만, 장애를 극복했다는 말은 ‘극복하지 못한’ 장애인을 패배자로 지칭하며 장애인들이 마주친 현실의 장벽을 가린다. 우리라는 인물을 통해 장애를 극복했다는 표현이 장애인에게 폭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표현하고자 했다. 따라서 시각장애인인 우리를 보는 것이 아닌, 서영과 승윤의 연기를 통해 펼쳐진 '우리가 쓴 연극'에 주목하자는 시사점을 남기고자 했다.
인권평
우리의 연극을 쓰다.
-홍성훈 | 19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프로그램위원
무대 조명이 켜지면 연극이 시작된다. 연극이 이어지고 진지한 대사, 사뭇 비장한 분위기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제법 성공적인 연극을 해낸 배우 승윤과 서영에게 대학 친구들이 꽃다발을 안기며 축하인사를 건넨다. 그들 사이에서 쭈뼛쭈뼛 대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연극 대본을 쓴 우리다. 우리를 본 승윤이 친구들에게 소개한다. 그 순간 사람들의 시선은 우리에게로 꽂힌다. 연극 조명은 꺼졌지만 사람들의 관심 조명은 우리에게 닿은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는 조금 특별한 작가다.
우리는 이동할 때 케인(이동 보조기기)을 이용하고, 청각에 의지하는 삶이 익숙한 시각장애인이다. 그는 글을 쓰는 작가 지망생이자 대학생인데, 어느 날 학교에서 우연히 배우 지망생인 승윤과 서영을 만나 연극을 준비하고 올렸던 것이다. 그렇게 각자의 노력으로 완성한 연극을 성공적으로 마친 세 사람은 뜻밖의 일을 맞이한다. 그 일은 학내 잡지에 세 사람의 연극을 다룬 기사가 나온 것. 기사는 승윤의 친구가 쓴 것인데, 우리는 그 기사가 조금 불편하다. 그가 불편해하는 지점은 자신을 ‘장애를 극복한 작가’로 부르고 승윤, 서영과 함께 이룬 것들을 지워버린 것이다. 그런데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승윤도 마찬가지다. 우리 위주로 나온 기사를 보면서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었는데, 우리가 그 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니 화가 난 것이다. 둘 사이에서 생긴 이 불편함은 우리와 승윤이 서로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고 둘을 중재했던 서영에게서 들은 말을 오해한 결과다.
영화는 우리와 승윤이 갈등을 고조시키다가 끝에 이르러서 각자의 생각을 확인하고 오해를 푸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승윤은 우리가 왜 그 기사를 불편해하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고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장애 극복 서사’가 지워버리는 수많은 것들을 깨닫게 되었다. 주인공 세 명은 ‘장애를 극복한 우리가 쓴’ 공연을 한 것이 아니라 세 명이 모인 ‘우리’가 함께 작품을 만들고 공연을 만들었음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영화는 끝난다.
다루고 있는 주제에 비해 무겁지 않은 톤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영화는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장애 극복 서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끔 한다. 다만 “나는 내 장애보다 내 글로 사람들에게 평가받았으면 한다.”는 우리와는 달리 실제로 자신의 장애를 정체성으로 삼아 작업을 하고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많은 장애예술가들이 이 사회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놓치는 것 같아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우리의 연극을 쓰다>를 연출한 세 명의 감독들이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주었으면 한다.
<우리의 연극을 쓰다>는 그 출발점으로 삼기에 좋은 작품이 될 것이다.
배심원들
감독 홍용호 | 2018 | 극 | 25분 | 기획·제작 홍용호, 조수진
- 배리어프리 ⭕
시놉시스
밤늦게 귀가하는 여성을 강간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된 어느 막노동자에 대한 재판. 최종 변론이 끝난 후 7명의 배심원들이 피고인의 유무죄를 놓고 각자의 편견을 드러내며 토론을 벌인다.
기획의도
우리 모두에게 내재된 편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인권평
-박정수 | 노들장애학 궁리소
강간치상 피고인에 대한 국민참여 재판 최종 판결을 앞두고 7인의 배심원들이 회의한다. 피고는 일용직 노동자 남성, 중졸에 전과자, 평소 야동을 즐겨보고, 애인을 자주 때린다. 그런데 물증은 없고, 피고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한다. 피해자의 진술도 오락가락, 조사과정에서 경찰의 강압과 협박도 있다. 무죄 추정의 원칙과 사람을 보지 말고 행위를 보라는 사법적 원칙은 성폭력에 대한 ‘정의로운’ 분노와 피고인의 전력, 정황, 인간 됨에 대한 편견 앞에 무력 해진다. 소위 ‘정상적’ 가치와 ‘안전사회’를 염원하는 다수 배심원은 피고인의 유죄를 주장한다. 반면, 평소 편견과 차별의 피해 경험이 많은 장애인, 여성, 이주민은 다수 의견에서 차별의식과 편견을 느낀다. 특히, 뇌병변 장애인은 경찰의 강압 수사와 다수 배심원의 편견이 얼마나 위험한지 역설한다. 결국, 피고인은 다수결로 유죄 선고를 받게 되고, 끝까지 자신의 혐의를 부정한다. 강제로 끌려가는 피고인은 배심원 중 장애인을 쳐다보며 “저런 xx이 왜 여기 있어!”라며 장애인 혐오 발언을 쏟아낸다. 한낱 장애인한테 심판당한 것이 억울하다는 듯이. 그는 세상에 대한 분노를 약자에게 쏟아내는 데 매우 익숙해 보인다.
<12명의 성난 사람들>을 연상시키는 이 영화는 물론 장애인의 인권을 초점화하진 않는다. 대신 도시 하층민 남성에 대한 편견이 전면에 등장한다. 현실에서 소수자 혐오와 편견의 중심 세력이라 할 수 있는 집단의 일원을 편견의 피해자 위치에 놓는다. 자칫 그 집단을 방어하거나 ‘우리 모두 편견의 피해자이자, 가해자다’는 식으로 문제를 희석할 위험도 있다. 그런데도, 소위 ‘정상적인’ 가치를 존중하는 다수 배심원이 장애인, 여성, 이주민과 대립된 관계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로 그려진 것은 시의적절한 문제의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다수자에 맞서 뇌병변 장애인이 자신의 차별 피해 경험을 가지고 편견의 위험성을 역설하는 모습과 마지막 반전으로 피고인이 장애인 혐오 발언을 내뱉는 장면은 이 영화를 ‘장애인 인권 영화제’에 상영해도 좋을 요인이라 생각한다.
편견의 피해자 위치에 있던 사람이 다른 소수자를 향해 편견을 드러내는 아이러니가 부디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을 흐리는 희석효과가 아니라 가해의 위험성에 대한 예민함의 상승효과를 내기 바란다. 그래서 이 영화의 관람이 소수자들 간에도 편견이 있을 수 있으며, 한 사람 안에는 한 가지 정체성이 아니라 다양한 교차성이 있다는 성찰로 이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