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권리를 생산하는 노동자입니다
2024 | 17’ 32“ | 다큐 | 황나라
배리어프리 ⭕
시놉시스
여기 꿋꿋하게 노동의 현장을 지키는 노동자들이 있다. 경기도 시흥시에 위치한 두리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 출근하는 노동자들은 저마다의 힘듦이 있지만 노동할 수 있다는 사실 만큼은 소중하게 생각한다.
“캠페인도 일이다” 두리센터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노동자 대혁은 밖에서 ‘장애인도 시민으로’라는 구호를 외치고 권리를 알리는 본인의 일이 즐겁다.
“데모는 힘들지만 사람들 만나서 좋아요” 노동자 은영은 더운 날 거리에 나가 캠페인하는 일은 힘들지만 출근해서 직장동료를 만나고 교제하는 것을 좋아한다.
“집에서 텔레비전보는 건 심심해요”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를 통해 처음으로 직장을 다녀본 지영은 집 밖으로 나와 출근한다는 게 행복하다.
“권익옹호 활동과 장애인식개선을 합니다” 민재는 말수는 없어도 자신의 노동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인지하며, 꾸준히 노동하고 싶다는 분명한 의사가 있다.
인권평
서한영교 (23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집행위원)
-니가?
“집에 있었어요. 집에. 테레비. 봤어요. 테레비. 하루 종일 텔레비 보는 게 일이죠. 뭐, 너무 심심해서요 뛰쳐나가고 싶은데, 엄마가 막아서 못 갔어요.”
영화에 등장하는 노동자 지영씨는 말했다. 맞다. 숱하게 들어왔다. 몸도 안 좋은데 그냥 집에 들어가 있어라, 주변사람들에게 폐 끼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는 저주를 자주 들어왔다. 가만히, 조용히, 얌전히 방구석에 시설 구석에 처박혀 텔레비전나 보며 히히히 거리고 있으라 했다. 지영씨 엄마뿐만이 아니라 온 사회가 장애인들을 막아섰다. 버스, 학교, 열차, 은행, 비행기, 편의점, 식당, 카페 곳곳에 문턱을 세워 장애인들을 턱턱 막아섰다. 장애가 있는 지영씨가 ‘테레비‘ 밖으로 , 현관 문턱 밖으로 나가서 노동한다고 했을 때, 동생은 말했다. “니가?“
-이게?
경제적 ‘쓸모‘를 떠받드는 근대경제학은 장애인을 ‘노동할 수 없는 사람들‘로 규정했다. 그 견고한 역사 속에서 장애인의 노동은 언제나 “니가? 일한다고?“ 라는 반문을 마주해야 했다. 장애인의 노동은 ‘사랑이 가득한 일터‘로 포장된 재활노동(보호작업장)이거나, 시혜적 복지노동(공공노동)이거나, 노예노동(염전, 쓰레기장, 개농장, 양식장)으로 연상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권리를 생산하는 노동자입니다> 영화 속 노동자들의 노동은 이게? 이런게? 노동이라고? 질문하게 한다. 맞다. 비장애인들이 겪어온 노동의 긴 목록들 중에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수행하는 노동을 노동이라고 불러본 적 없다. 동네시장에 나가 상인들에게 UN장애인권리협약문을 전달하고, ‘차별 없는 명절 맞으세요‘ 인사하며 평등캠페인을 진행하고, 북치고 노래하며 공연노동을 수행하고, 그림을 그리고 발표하는 일을 두고 “이것도 노동이다”라고 할 때 , 다소 당황할 수 있다. 맞다. 기존 노동을 의아하게 만드는 노동, 노동의 개념에 도전하는 노동, 장애를 둘러싼 사회적 감각의 배치를 이동시키는 노동, 바로 “권리를 생산하는 노동“이다.
-이것은 복숭아입니까?
이것은 “황도 복숭아입니다“ 영화 속 노동자 민재 씨는 분홍과 노랑, 주황과 하양의 색깔들이 서로를 침범하며 번져있는 그림을 쥐고서 말한다. 이것은 복숭아이고, 이것도 노동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입증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권리와 투쟁‘으로 빚어낸 중증장애인 노동의 가능성을 한 장면, 한 장면 조각모음하듯 배치한다. 극복-재활-보호 노동에서는 등장할 수 없는 권리중심-중증장애인의 노동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이야기와 이미지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한 조각, 한 조각 보여준다.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저마다의 경험과 느낌들을 조각모음하며 각자의 질문을 조직하게 한다. 복숭아란? 노동이란? 생산이란? 예술이란? 권리란? 어떤 것인가?
머릿속을 떠들썩하게 한다. 세상을 바꾸는 권리중심 노동은 기존에 익숙한 장애/비장애를 둘러싼 언어의 배치를 떠들썩하게 한다.
-떠들썩 노동
“풍악을 울려라 온 세상 떠들썩하게” 영화 속 노동자 대혁씨는 북을 치며 노래한다. 대혁씨의 노래 가락에 맞춰 중증장애인들의 노동이 전국방방 곳곳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 서울에서 시작된 <서울형권리중심중증장애인맞춤형공공일자리>는 경기, 경남, 강원, 전남, 전북, 인천, 광주 서구, 춘천, 제천, 부산...전국 각지로 떠들썩하게 번져나가고 있다. 권리중심 노동은 유례없는 미래를, 전례 없는 노동을 수행해 나가며, 견고한 현재를 이동 시켜나가고 있다.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비장애중심 ‘노동’에 포함(인정, 포용)되는 것뿐만 아니라, 다층적 시민-존재자들의 ‘고유함’을 바탕으로 둔 노동, 권리를 옹호하는 노동, 공공의 가치를 실현하는 노동, 권리를 생산하는 노동을 통해 “온 세상 떠들썩하게“ 질문하고 있다. 이 떠들썩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이가 있다. 바로, 오세훈 서울시장이다. 최중증장애인노동자 400명을 일시에 해고한 것이다. 영화 속 노동자 대혁씨는 권리중심일자리를 폐지한 오세훈 서울시장에게 조언한다. “없애지 말고요. 키우세요. “대혁씨는 덧 붙인다. “오세훈 시장은 뭐였지? 오세훈 시장은 건강하게 살아라! 오세훈 시장은 퇴진하라! 투쟁!“ 이제, 온 세상 떠들썩하게 최중증장애인노동자 해고복직투쟁의 풍악이 들리는 듯도 하다. 풍악을 울려라 온 세상 떠들썩하게“투쟁!“

우리가 함께 부르는 노래
감독 장호경 | 2024 | 다큐 | 40분
- 배리어프리 ⭕
시놉시스
노들장애인야학에는 노래를 만드는 공장이 있다. 이름하여 ‘노들노래공장’ 노노공. 노노공에서 만드는 노래는 좀 특별하다. 발달장애인 당사자가 직접 가사도 쓰고, 멜로디도 만든다. 이곳에서 만수의 역할은 각자의 노랫말과 흥얼거림이 하나의 노래가 될 수 있게 하는 일이다. 만수는 영화음악도 만들고, 노래도 만드는 음악가다. 음악가인 만수에게 노노공과의 작업은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한다. 이 영화는 비장애인 음악가와 발달장애인 음악가들이 만나 노래를 만드는 과정을 담은 영화다. 발달장애인의 예술 활동은 얼마나 예술적인가. 우리는 발달장애인과 지역 사회에서 어떻게 함께 살 수 있을까. 노노공의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과정은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인권평
이정한(22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집행위원)
2020년, 노들장애인야학의 장애인 당사자들은 거주시설 인강원에서 나온다. 그들은 수업이기도 하고 일이기도 한 무언가에 참여하러 간다. “최중증장애인에게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노동권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일자리 사업”이라는 조경익 서울시 장애인복지정책과장의 말은 우리의 요구와 맞닿아 있어 반가움도 있다. 물론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지만.
장애인고용촉진법에서 장애인 고용 할당제를 만들자던,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의 요구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여전히 경쟁과 효율 중심의 체제 안에서 기업은 장애인을 고용하기보다 고용부담금을 납부하길 선택했고, 혹은 기피하는 일자리를 주거나 장애인을 전시할 수 있는 방식으로만 일자리를 제공했다. 한국의 장애인은 시혜와 동정의 대상이지만 일자리에서만큼은 그 동정조차 허락되지 않고 있다. UN장애인권리협약이 장애인의 노동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의무가 있는 한국 정부는 여전히 모른 체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경쟁과 효율 중심 체제 안에선 장애인에게 일자리를 준다는 자체가 많은 것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화를 생산하는 노동이 함의하고 있는 것은, 이 노동에는 노동권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노동권이 있어 노동할 수 있으니 재화를 생산할 수 있다. 이 당연한 말, 노동할 권리가 있으니 노동한다는 말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있다. ‘재화를 생산하는 노동’은 하나의 노동 양태를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재화를 생산하지 못하는 노동은 노동이 아니’라는 것을 은폐하고 있다. 노동할 권리가 없는 이들은 재화를 생산할 수조차 없다. 그러니 결국 어떤 방식으로도 ‘노동’에 다가설 수 없다. 그러나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는 바로 이 근원적인 괴리에 대해 도전한다. 노동할 권리가 없는 이들이 노동한다면 그 노동이 생산하는 것은 재화가 아니라 권리다. 노동할 권리가 없을 때 노동을 통해 권리를 생산한다는 것은, 노동이라는 개념에 대한 도전이자 경쟁과 효율 중심의 체제 자체에 대한 균열이다. ‘이것은 노동이 아니다’라고 낙인 찍혀 왔던 그 활동들을 수행하며 ‘이것도 노동이다’라며 몸소 증명하고 있다.
그러니 이것은 수업이기도 하고 일이기도 한 무언가다. 때때로 이것은 시위처럼 보이기도 하고 고성방가인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예술적 가치가 있나 물음이 따르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현대의 노동을 재구성하는 하나의 혁명이다. 권리를 생산하고, 중증장애인에게 맞춤형으로 제공된 직무를 수행하고, 정부가 져야 할 책임을 대신 떠안은 이 노동이야말로 지금 시대의 유일한 ‘진짜 노동’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임금을 위해 노동력을 파는 행위였다면,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그 자체로 이 전제를 허무는 노동이기 때문이다.
산을 그리고 바다를 그리기 위해 정해진 방식의 선과 색깔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렸기에 자신의 설명이 뒤따라야만 이해할 수 있다. 도무지 이것이 ‘가지’인지 ‘송편’인지 봐서는 알 수 없지만 만순은 그저 동그란 모양을 보고도 자신이 송편을 그렸음을 단박에 기억한다. 권리중심 중증장애인맞춤형 공공일자리가 갖는 가치는 여기에 있는 셈이다.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찍어내는 상품이 아니라, 장애 당사자이자 노동자로서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만들어 내고, 그 생산물에 자신의 이야기를 더해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장애인의 존엄을 드러낸다.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지금도 전국에서 고유한 가치를 하나하나 만들어 가고 있다.
출근부에 낯설게 이름을 쓰던 이들은 2022년이 되자 어느덧 각자의 삶에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어떤 꿈을 꿨고, 무엇을 먹었고, 누구와 연애하며 무엇 때문에 이 동료가 좋은지를 이야기한다. 일로 만난 그들의 사이는 어느 사이에 끈끈하고 정겨워졌다. 그 언젠가의 추억을 같이 떠올리며 웃고 떠든다. 1년 차엔 ‘일이기도 수업이기도 한’ 무엇이었다면, 이제 이들에게 이 일자리는 ‘삶 그 자체’가 되었다.
노동으로 만나는 관계는 또 하나의 새로운 삶을 정초한다. 시설 속에서만의 관계나 가족 내의 관계라는 협소하고 강제된 관계가 아니라, 내 선택과 내 결정으로 이뤄지는 관계는 분명 새로운 삶을 만들어 낸다. ‘직장’이라는 단어가 누군가에겐 억압이겠지만, 어떤 이들에겐 하나의 해방이다. 경험한 적 없는 직장에서, 노동자로서 이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나의 말이 하나의 의견이 되기에 이곳은 단지 직장이 아니라 일의 터전이 된다. 그러니 자신의 삶을 투영해 탈시설의 권리를 알리고, 이동권의 현실을 알리는 등 자신의 방식으로 서툴게 전해 낸다.
노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질문과 대답 속에서 말해지는 각자의 이야기에서 만들어진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줄게요”,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도 미안해”, “시간이 빨리 가”. 툭 던져지는 말에 담긴 그들의 깊은 마음들이 노랫말이 된다. 허물 없이 드러내며 이것은 노래가 된다. 모두는 자신의 방식으로 흥얼거리고 노래한다. 과연 이게 노래가 맞는지, 스멀 피어오르는 의심엔 관심도 없는 듯 이 노래를 만드는 이들은 꾸준히 흥얼거리고 노랫말을 쓴다.
그리고 이것은 노래만이 아니다. 우리의 노동이 이렇게 만들어지고, 삶이, 혁명이 그렇게 만들어진다. 질문과 대답 속에서 말해지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노동이, 삶이, 투쟁이, 혁명이 만들어진다. 단조로운 말들에 음이 더해지고 노래와 춤으로 드러난다. 갇힌 방에서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열린 공간에서 함께하기에 이것은 더 멀리 퍼져 나간다.
우리에겐 더 많은 ‘목격자’가 필요하다. 중증장애인 노동자들이 만드는 그 권리들은 재화가 아니기에 시장에 공급되지 않는다. 어딘가의 건물에서 어딘가의 사소한 사례로 사그라들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에겐 이것이 생산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는 이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시간이 흐르며 모든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탄압으로 일자리가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도 있고, 그저 시간이 흘러 흐려질 수도, 떠나고 바뀌며 모든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 곁에서 목격하고, 이것을 이야기하고, 노래와 영상으로 남겨 더 많은 이들에게 증언하는 목격자가 있다면, 한 번은 사라져도 언제든 다시 되살아난다. 폐지된 서울시 권리중심 중증장애인맞춤형 공공일자리 사업은 권리와 운동의 종결을 뜻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챕터가 끝났을 뿐이다. 여전히 사는 게 재밌다고, 노래하고 모여 춤추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 재밌다고 노래를 만들면 그 기억은 기록이 된다. 끝난 챕터 후에도 멈추지 않고 노래는 이어진다. 함께 부르기 때문에.

나의 오후는
감독 서호영 | 2024 | 다큐 | 3분 52초 | 제작 노들야학 영화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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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마로니에공원을 산책하며 ‘하늘’ 사진을 많이 찍는다.
언어로 소통하는 어려움과 일자리가 불투명해져서 속상한 마음에 하늘을 보면 답답한 마음이 풀어진다.
나의 오후 중심에는… 노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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