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해외초청작 특별 인권평
『어떻게 해야 했을까?』라는 질문에 반문하기
위은솔(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센터장)
[들어가며]
작년 제23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를 통해 영화 『어떻게 해야 했을까?』가 상영되기 전, 개인적으로 먼저 영화를 보고 잠시 고민할 기회가 있었다. 이후 영화는 한국에서 공개적으로 상영되며 2026년 현재 정신장애계를 비롯해 시민들에게도 적잖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다만 영화를 둘러싼 다수의 GV와 평론이 정신질환의 ‘조기 개입’을 강조하거나, 정신 의료를 사실상의 해답으로 읽어내는 데 대한 문제 제기 또한 이어졌다. 이에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비롯한 여러 단체가 공동체 상영회를 열었고, 나는 작년에 이어 다시 마사코와 그 가족들을 간접적으로 만났다.
먼저 마사코에게 감사함과 미안함을 전하고 싶다. 감사함은,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이 비슷하게 느끼리라 생각한다. 마사코는 자신이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보이고, 해석되고, 평가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생을 마쳤다. 나는 그 사실에서 비롯되는 여러 겹의 미안함을 안고 이 글을 시작한다.
[마사코는 갇혀야만 하는 이상한 사람인가?]
『어떻게 해야 했을까?』를 보는 내내 감독의 의도를 생각하고, 추측하고, 의심했다. 의도가 불순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지금의 영화는 20여 년에 걸친 가족의 기록이자 한 편의 작품이 되었다. 후지노 토모아키 감독이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영화를 만들 생각으로 카메라를 들었던 것은 아니다. 영화 초반에는 감독이 가족을 촬영할 구실을 일부러 만들어 카메라를 들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렇다면 카메라를 들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누나의 삶을 기록하기 위해서였을까, 가족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고 싶어서였을까, 부모와는 다른 방식으로 누나를 만나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자신의 오랜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어서였을까. 아마 이 모든 것이 뒤섞여 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와 방한 인터뷰를 함께 보면, 그를 마냥 나쁜 동생이었다고 여기기는 어렵다. 그는 부모의 방식에 끊임없이 의문을 품었고, 마사코에게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를 물었다. 가족이 오히려 누나를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 적어도 자신은 다른 방식으로 누나와 연결되고 싶어 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더 묻고 싶다. 마사코의 동생, 감독 본인은 정말 마사코의 입장에 서본 적이 있는가.
영화에서 감독은 마사코에게 여러 가지를 묻는다. 요즘의 관심사나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와 같은 질문들을 한다. 당사자의 시선에서 이러한 질문과 접근은 좋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문제는 질문 다음이었다. 마사코가 대답할 충분한 시간은 늘 주어지지 않았다. 하나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질문이 이어진다. 질문은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마사코의 답은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질문에 답하지 않는 마사코가 이상한 것일까, 답할 틈을 주지 않는 질문들이 이상한 것일까.
마사코가 유치원에 다니던 남동생과 유원지에 갔던 이야기를 하다가 아폴로호가 실패했다고 이야기한다. 아마 많은 관객에게 이 장면은 마사코의 말이 얼마나 와해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기억될 것이다. 나는 왜 유치원의 기억이 아폴로호로 이어졌는지가 궁금했다. 마사코는 이전부터 우주에 관해 이야기했다. 목성을 이야기했고, 비행기와 헬리콥터를 찍고 싶다고 했다. 점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적어도 마사코 안에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연결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회가 흔히 망상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과 그 표현들이 그저 아무런 의미 없이 발생하는 생각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정신의학이 지리멸렬하고 와해된 언어라고 이름 붙이는 말에도 그 생각과 표현을 하는 사람 안에서는 연결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내가 그 연결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과 그 연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마사코의 진짜 관심, 마사코 안의 연결성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마사코의 언어와 행동은 이상한 것이 되었고, 가족의 언어와 행동, 그들의 방식은 마치 다수가 이미 결의라도 한 듯 정상적인 것이 되었다. 새해 풍습에 동조하지 않는 모습, 우주와 점성술에 몰두하는 모습도 관객에게는 쉽게 ‘이상한 마사코’를 설명하는 자료가 된다.
반면, 마사코의 입장에서 보면 가족 모두가 이상한 사람일 수도 있다. 왜 저 사람들은 정해진 규칙을 그렇게 열심히 따라야 할까, 왜 본인이 좋아하는 것에는 계속 이유를 물으면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에는 이유를 묻지 않을까, 왜 의학 논문을 쓰는 것은 훌륭한 일이 되고 점술을 연구하는 것은 그만두어야 하는 일이 되는가. 마사코는 점술책을 내고 싶어 했다. 가족은 국가고시를 보라는 조건을 붙인다. 맥주를 마시는 것도 안 된다. 가족사진을 찍을 때 마사코는 서 있고 싶어 하지만 앉으라고 한다. 아버지는 서 있는데도 말이다. 마사코는 공부해야 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정작 자신의 연구와 관심을 이야기하면 그것은 오히려 터부시되며 그만두어야 할 일이 된다. 마사코는 정말 결정해서는 안 되는, 금지될 만한 행동을 하는, 통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존재인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답하고 싶다. 마사코는 결국 원하던 책을 냈다. 혼자 연금을 해약했다. 연금 해약의 목적 또한 분명했다.
비행기표를 끊어 뉴욕으로 가기 위함이었으며, 원하는 바를 이뤘다. 화장하고 자신이 원하는 곳을 가기도 했다.
은행 업무를 하고, 비행기표를 사고, 공항까지 찾아가 장거리 비행을 거쳐 미국에 도착하는 사람이 왜 집에 갇혀 있어야 하는가. 마사코는 정말 갇혀야만 하는 이상한 사람이었는가.
그러나 가족에게 그런 마사코는 충동적이고 이상한 딸이자 걱정거리였다. 이에 결국 마사코를 ‘위한다는 이유로’ 밖에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집에는 자물쇠가 채워졌다. 이웃에게 이러한 상태가 알려지는 것도, 경찰이 오는 것도 막아야 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선명한 폭력의 상징은 아마 자물쇠일 것이다. 감독 역시 그 자물쇠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여러 과정을 거쳐 자물쇠가 사라지는 장면은 쉽게 마사코의 해방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마사코가 집 밖을 오갈 수 있게 된 뒤에도 자유롭지는 않았다고 느꼈다. 현관의 자물쇠는 열렸지만, 마사코의 삶에는 수많은 자물쇠가 남아 있었다. 영화는 마사코의 입원 과정을 자세히 보여주지 않는다. 어떤 과정을 거쳐 입원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과정 역시 마사코의 몸과 의사에 반하는 또 다른 자물쇠를 채우는 방식은 아니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치료 이후 마사코는 대화가 가능하고 옷차림도 단정해진 사람으로 그려진다. 사회가 용인하는 정상에 가까워졌기에 현관의 자물쇠가 필요 없어졌던 것은 아닐까. 영화 후반 감독은 “누나가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마음껏 할 수 있게 해주었다”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승인이 있어야만 비로소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삶, 과연 마사코에게 채워졌던 자물쇠는 완전하게 사라진 것일까.
[‘누가 마사코를 가장 위하나’를 겨루는 경쟁인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족의 사랑이 없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족들은 마사코를 무척이나 사랑했던 것 같다. 너무나 사랑했기에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했다. 문제는 사랑의 크기가 아니라 그 사랑이 향하는 방향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그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그 사람이 결정할 권리까지 대신해 주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이상한 경쟁이 보인다.
부모는 자신들의 방식으로 마사코를 위한다. 동생은 부모의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며 자신은 다른 방식으로 마사코를 위하려고 한다. 정신의학은 치료의 언어로 마사코를 위한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또다시 “그때 병원에 데려가야 했다”, “더 일찍 치료해야 했다”라며 마사코를 위할지 모른다. 이는 마치 ‘누가 누가 가장 마사코를 더 위하나’를 겨루는 것 같다.
그런데 이 경쟁에 이상하게도 마사코의 자리는 없다.
부모는 병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쟁하고,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지 서로에게서 원인을 찾는다. 동생은 제 3자(정신과
의사)와 이야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족은 마사코의 삶을 두고 끊임없이 토론한다. 정작 그 논쟁에 대해 마사코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마사코의 목소리는 배제된 채, 스스로가 스스로를 위하는 방식은 제거의 대상이 되어갔다.
병이냐 아니냐, 정상이냐 비정상이냐, 설탕물을 먹어야 하느냐 마느냐, 금단 증상이냐 아니냐, 병원에 빨리 가야 했느냐 아니냐와 같은 문제가 아니다. 이 모든 선택지를 포함하여 왜 마사코가 선택의 주체가 될 수 없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감독은 부모와 달랐다. 분명하게 달랐다.
부모가 하지 않았던 질문을 했고, 부모의 행동을 의심했고, 누나와 연결되려고 했다. 영화 속에서 자기 행동을 돌아보기도 한다. 그래서 감독의 시도를 폄훼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감독의 연결은 끝내 마사코가 원하는 방식의 연결이라기보다, 자신이 마사코와 연결되고 싶은 방식의 연결에 가까웠던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부모는 마사코를 집 안에 가두었다. 그렇다면 동생은 수십 년간 마사코를 자신의 프레임 안에 가두지는 않았는가. 카메라는 분명 부모가 외면했던 것을 기록했다. 동시에 카메라는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지 결정한다. 영화에는 “만든 의도를 알 수 없는 것들”이라는 자막과 함께 마사코가 만든 것들이 등장한다. 관객에게 그것들은 다시 한번 이해할 수 없는 마사코의 상태에 대한 증거가 된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만든 의도를 알 수 없는 물건이었을지, 왜 감독을 비롯한 가족은, 관객 중 누군가는, 그 의도를 묻거나 궁금해하지 않은 채 단순히 의도를 알 수 없다고만 받아들여 버렸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조기 개입만이 답인가?]
영화를 둘러싼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너무 쉽게 흘러간다.
마사코에게 정신질환이 발생했다. 이를 부모가 인정하지 않았고, 병원에 가지 않았다. 20여 년이 넘게 흐르고서야 입원했다. 이후 마사코에게 맞는 약(의사 혹은 가족의 입장에서)을 찾았고, 석 달 뒤 퇴원했다. 마사코는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고 옷차림도 단정해졌다.
감독 역시 방한 인터뷰에서 치료 이후 마사코와 대화할 수 있게 된 변화가 영화를 만들게 된 출발점이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서사가 완성된다.
‘발병 → 치료받지 않음 → 악화 → 뒤늦은 치료 → 호전’에 이르는 이 서사를 따라가면 답은 ‘더 일찍 치료했어야 했다’로 치우치게 된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어떻게 해야 했을까?』라는 질문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된다.
이미 정답을 가지고 있다면 왜 질문하는가. 영화가 말하는 ‘어떻게’의 답이 결국 ‘더 빨리 정신질환임을 인정하고 병원에 데려갔어야 한다’로 수렴한다면, 제목의 물음표는 질문이라기보다 이미 가진 정답을 확인받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감독은 본인이 부모보다 마사코를 더 위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도 이어 따라온다.
물론 필요한 의료적 지원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약물과 병원이 필요할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많은 가능성 가운데 하나의 선택지가 아니라, 마사코의 지나간 삶 전체를 설명하는 유일한 정답인 것과 같이 그려지는 영화의 메시지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조기 개입했어야 했는가? 마사코에게 정신의학은 너무 늦게 개입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족과 사회는 마사코의 삶에 너무 일찍부터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8월 22일의 공동체 상영회 GV에서 정신과 전문의인 유기훈 교수는 정신의학적 조기 개입 외의 다른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그는 마사코의 죽음 뒤 아버지가 공동 작업하던 논문을 관에 넣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고 이야기하며, 마사코에게 “논문을 쓰지 못해도 괜찮다”, “훌륭한 의사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지원이 있었다면 어땠을지 논했다. 하나의 길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가능성과 선택지를 확보하는 것 또한 국가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마사코에게 너무 늦었던 것은 조기의 진단과 치료만이 아니었다. 아, 앞 문장은 틀렸다. 마사코에게 어느 누구도 다른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마사코의 방식으로 타인과 연결될 가능성을 제시하지 않았으니 다른 방식은 늦은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마사코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누구도 묻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 라고 묻기 전에]
감독은 한국을 두 차례 찾았다. 한국에서도 이 영화를 둘러싸고 많은 GV가 열렸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비롯한 영화계 사람들이 모여 영화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런데도 정신장애 당사자단체인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비롯한 여러 단체—(사)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 경기우리도,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송파정신장애동료지원센터, 한국정신장애인연합회, 해방정신보건연구회—가 직접 공동체 상영회를 준비한 이유는 단순했다. 정신장애 당사자의 영화인데 이상하게도 당사자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의 GV에서는 당사자와 가족, 정신과 의사와 변호사가 함께 앉았다.
감독의 물음에 답하기 이전에 감독에게 묻고 싶다.
한국을 두 번이나 오가며 당신은 한국의 마사코들을 만나보았는가. 마사코에 관한 이야기를 정신과 의사와 영화계 전문가와 나누기 이전에, 마사코와 비슷한 경험을 살아온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려 한 적이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은 누나의 입장에 진정으로 서보려고 했는가.
이 질문은 감독을 비난하기 위해 던지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감독 역시 20년 동안,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왔을 것이다. 영화를 만들면서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고 부모를 의심하고 자신까지 의심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본 당사자로서 나는 감독이 던진 질문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감독은 ‘어떻게 했어야 제일 좋았을지’에 대해 아버지에게 묻는다. 그 장면에서 나는 저 질문의 대상은 아버지가 아니라 마사코여야 했다는 생각을 반복했다. 영화 속 가족도, 관객의 대다수도 마사코에게 어떻게 해야 했을지 고민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사코에게 어떻게 하고 싶은지를 묻는 사람은 없다.
글을 쓰고 보니 ‘이상하다’라는 말을 유난히 많이 썼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계속 그 말로 돌아오게 된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이상함을 이야기하고 싶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라는 질문은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인가. 질문의 문법부터 이상하다. 가족이 마사코에게 무엇을 해야 했는가. 의사가 마사코에게 무엇을 해야 했는가. 사회가 마사코에게 무엇을 해야 했는가. 마사코는 언제나 누군가가 ‘무엇을 해야 하는’ 대상의 자리에 놓인다. 하지만 정신질환 및 정신장애 당사자 역시 다른 누구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선택하고, 실패하고, 후회하고, 이상한 선택마저 할 권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마사코는 어떻게 했어야만 하는 ‘대상’으로 이해되는가.
끝으로,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이 영화와 영화를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는 마사코를 ‘조현병을 가진 사람’으로 호명한다.
한 사람의 삶과 언어, 감각과 관계가 ‘조현병’이라는 하나의 진단으로 너무 쉽게 설명되지 않기를 바란다.
조현병은 정신질환을 이야기할 때 유독 대표처럼 소환되는 진단명이다. 당사자의 위험, 강제 입원, 치료, 약물, 조기 개입을 이야기할 때도 가장 먼저 등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보면 정신적 고통과 독특한 경험의 세계 전체가 마치 조현병 하나인 것처럼 좁혀질 수 있다. 다른 진단명을 부여받고 살아가는 사람들, 특정 진단명으로 설명되지 않는 경험을 하는 사람들, 아직 어떤 이름도 가지지 않은 상태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뒤로 쉽게 밀려난다.
그렇기에 ‘마사코’라는 한 사람의 일대기가 조현병이라는 이름에 모두 흡수되지 않았으면 한다. 또한 마사코를 이야기한다는 이유로 또 다른 누군가의 경험이 보이지 않게 되지 않았으면 한다. 사람을 분류해 내기 위해 붙인 진단명이 그 사람보다 커지는 순간, 우리는 또다시 어떤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얻게 될지 모른다.
결국 내가 이 영화를 보고 가장 오래 붙들고 있는 질문은 영화의 제목과는 다르다.
마사코에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가 아니라, 마사코는 어떻게 하고 싶었을까. 이 질문을 충분히 묻는 것, 답을 기다리는 것, 침묵 또한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먼저였다면 조금 달라지지는 않았을까.
23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해외초청작 특별 인권평
『어떻게 해야 했을까?』라는 질문에 반문하기
위은솔(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센터장)
[들어가며]
작년 제23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를 통해 영화 『어떻게 해야 했을까?』가 상영되기 전, 개인적으로 먼저 영화를 보고 잠시 고민할 기회가 있었다. 이후 영화는 한국에서 공개적으로 상영되며 2026년 현재 정신장애계를 비롯해 시민들에게도 적잖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다만 영화를 둘러싼 다수의 GV와 평론이 정신질환의 ‘조기 개입’을 강조하거나, 정신 의료를 사실상의 해답으로 읽어내는 데 대한 문제 제기 또한 이어졌다. 이에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비롯한 여러 단체가 공동체 상영회를 열었고, 나는 작년에 이어 다시 마사코와 그 가족들을 간접적으로 만났다.
먼저 마사코에게 감사함과 미안함을 전하고 싶다. 감사함은,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이 비슷하게 느끼리라 생각한다. 마사코는 자신이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보이고, 해석되고, 평가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생을 마쳤다. 나는 그 사실에서 비롯되는 여러 겹의 미안함을 안고 이 글을 시작한다.
[마사코는 갇혀야만 하는 이상한 사람인가?]
『어떻게 해야 했을까?』를 보는 내내 감독의 의도를 생각하고, 추측하고, 의심했다. 의도가 불순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지금의 영화는 20여 년에 걸친 가족의 기록이자 한 편의 작품이 되었다. 후지노 토모아키 감독이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영화를 만들 생각으로 카메라를 들었던 것은 아니다. 영화 초반에는 감독이 가족을 촬영할 구실을 일부러 만들어 카메라를 들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렇다면 카메라를 들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누나의 삶을 기록하기 위해서였을까, 가족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고 싶어서였을까, 부모와는 다른 방식으로 누나를 만나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자신의 오랜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어서였을까. 아마 이 모든 것이 뒤섞여 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와 방한 인터뷰를 함께 보면, 그를 마냥 나쁜 동생이었다고 여기기는 어렵다. 그는 부모의 방식에 끊임없이 의문을 품었고, 마사코에게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를 물었다. 가족이 오히려 누나를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 적어도 자신은 다른 방식으로 누나와 연결되고 싶어 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더 묻고 싶다. 마사코의 동생, 감독 본인은 정말 마사코의 입장에 서본 적이 있는가.
영화에서 감독은 마사코에게 여러 가지를 묻는다. 요즘의 관심사나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와 같은 질문들을 한다. 당사자의 시선에서 이러한 질문과 접근은 좋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문제는 질문 다음이었다. 마사코가 대답할 충분한 시간은 늘 주어지지 않았다. 하나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질문이 이어진다. 질문은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마사코의 답은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질문에 답하지 않는 마사코가 이상한 것일까, 답할 틈을 주지 않는 질문들이 이상한 것일까.
마사코가 유치원에 다니던 남동생과 유원지에 갔던 이야기를 하다가 아폴로호가 실패했다고 이야기한다. 아마 많은 관객에게 이 장면은 마사코의 말이 얼마나 와해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기억될 것이다. 나는 왜 유치원의 기억이 아폴로호로 이어졌는지가 궁금했다. 마사코는 이전부터 우주에 관해 이야기했다. 목성을 이야기했고, 비행기와 헬리콥터를 찍고 싶다고 했다. 점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적어도 마사코 안에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연결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회가 흔히 망상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과 그 표현들이 그저 아무런 의미 없이 발생하는 생각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정신의학이 지리멸렬하고 와해된 언어라고 이름 붙이는 말에도 그 생각과 표현을 하는 사람 안에서는 연결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내가 그 연결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과 그 연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마사코의 진짜 관심, 마사코 안의 연결성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마사코의 언어와 행동은 이상한 것이 되었고, 가족의 언어와 행동, 그들의 방식은 마치 다수가 이미 결의라도 한 듯 정상적인 것이 되었다. 새해 풍습에 동조하지 않는 모습, 우주와 점성술에 몰두하는 모습도 관객에게는 쉽게 ‘이상한 마사코’를 설명하는 자료가 된다.
반면, 마사코의 입장에서 보면 가족 모두가 이상한 사람일 수도 있다. 왜 저 사람들은 정해진 규칙을 그렇게 열심히 따라야 할까, 왜 본인이 좋아하는 것에는 계속 이유를 물으면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에는 이유를 묻지 않을까, 왜 의학 논문을 쓰는 것은 훌륭한 일이 되고 점술을 연구하는 것은 그만두어야 하는 일이 되는가. 마사코는 점술책을 내고 싶어 했다. 가족은 국가고시를 보라는 조건을 붙인다. 맥주를 마시는 것도 안 된다. 가족사진을 찍을 때 마사코는 서 있고 싶어 하지만 앉으라고 한다. 아버지는 서 있는데도 말이다. 마사코는 공부해야 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정작 자신의 연구와 관심을 이야기하면 그것은 오히려 터부시되며 그만두어야 할 일이 된다. 마사코는 정말 결정해서는 안 되는, 금지될 만한 행동을 하는, 통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존재인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답하고 싶다. 마사코는 결국 원하던 책을 냈다. 혼자 연금을 해약했다. 연금 해약의 목적 또한 분명했다.
비행기표를 끊어 뉴욕으로 가기 위함이었으며, 원하는 바를 이뤘다. 화장하고 자신이 원하는 곳을 가기도 했다.
은행 업무를 하고, 비행기표를 사고, 공항까지 찾아가 장거리 비행을 거쳐 미국에 도착하는 사람이 왜 집에 갇혀 있어야 하는가. 마사코는 정말 갇혀야만 하는 이상한 사람이었는가.
그러나 가족에게 그런 마사코는 충동적이고 이상한 딸이자 걱정거리였다. 이에 결국 마사코를 ‘위한다는 이유로’ 밖에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집에는 자물쇠가 채워졌다. 이웃에게 이러한 상태가 알려지는 것도, 경찰이 오는 것도 막아야 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선명한 폭력의 상징은 아마 자물쇠일 것이다. 감독 역시 그 자물쇠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여러 과정을 거쳐 자물쇠가 사라지는 장면은 쉽게 마사코의 해방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마사코가 집 밖을 오갈 수 있게 된 뒤에도 자유롭지는 않았다고 느꼈다. 현관의 자물쇠는 열렸지만, 마사코의 삶에는 수많은 자물쇠가 남아 있었다. 영화는 마사코의 입원 과정을 자세히 보여주지 않는다. 어떤 과정을 거쳐 입원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과정 역시 마사코의 몸과 의사에 반하는 또 다른 자물쇠를 채우는 방식은 아니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치료 이후 마사코는 대화가 가능하고 옷차림도 단정해진 사람으로 그려진다. 사회가 용인하는 정상에 가까워졌기에 현관의 자물쇠가 필요 없어졌던 것은 아닐까. 영화 후반 감독은 “누나가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마음껏 할 수 있게 해주었다”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승인이 있어야만 비로소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삶, 과연 마사코에게 채워졌던 자물쇠는 완전하게 사라진 것일까.
[‘누가 마사코를 가장 위하나’를 겨루는 경쟁인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족의 사랑이 없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족들은 마사코를 무척이나 사랑했던 것 같다. 너무나 사랑했기에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했다. 문제는 사랑의 크기가 아니라 그 사랑이 향하는 방향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그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그 사람이 결정할 권리까지 대신해 주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이상한 경쟁이 보인다.
부모는 자신들의 방식으로 마사코를 위한다. 동생은 부모의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며 자신은 다른 방식으로 마사코를 위하려고 한다. 정신의학은 치료의 언어로 마사코를 위한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또다시 “그때 병원에 데려가야 했다”, “더 일찍 치료해야 했다”라며 마사코를 위할지 모른다. 이는 마치 ‘누가 누가 가장 마사코를 더 위하나’를 겨루는 것 같다.
그런데 이 경쟁에 이상하게도 마사코의 자리는 없다.
부모는 병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쟁하고,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지 서로에게서 원인을 찾는다. 동생은 제 3자(정신과
의사)와 이야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족은 마사코의 삶을 두고 끊임없이 토론한다. 정작 그 논쟁에 대해 마사코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마사코의 목소리는 배제된 채, 스스로가 스스로를 위하는 방식은 제거의 대상이 되어갔다.
병이냐 아니냐, 정상이냐 비정상이냐, 설탕물을 먹어야 하느냐 마느냐, 금단 증상이냐 아니냐, 병원에 빨리 가야 했느냐 아니냐와 같은 문제가 아니다. 이 모든 선택지를 포함하여 왜 마사코가 선택의 주체가 될 수 없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감독은 부모와 달랐다. 분명하게 달랐다.
부모가 하지 않았던 질문을 했고, 부모의 행동을 의심했고, 누나와 연결되려고 했다. 영화 속에서 자기 행동을 돌아보기도 한다. 그래서 감독의 시도를 폄훼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감독의 연결은 끝내 마사코가 원하는 방식의 연결이라기보다, 자신이 마사코와 연결되고 싶은 방식의 연결에 가까웠던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부모는 마사코를 집 안에 가두었다. 그렇다면 동생은 수십 년간 마사코를 자신의 프레임 안에 가두지는 않았는가. 카메라는 분명 부모가 외면했던 것을 기록했다. 동시에 카메라는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지 결정한다. 영화에는 “만든 의도를 알 수 없는 것들”이라는 자막과 함께 마사코가 만든 것들이 등장한다. 관객에게 그것들은 다시 한번 이해할 수 없는 마사코의 상태에 대한 증거가 된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만든 의도를 알 수 없는 물건이었을지, 왜 감독을 비롯한 가족은, 관객 중 누군가는, 그 의도를 묻거나 궁금해하지 않은 채 단순히 의도를 알 수 없다고만 받아들여 버렸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조기 개입만이 답인가?]
영화를 둘러싼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너무 쉽게 흘러간다.
마사코에게 정신질환이 발생했다. 이를 부모가 인정하지 않았고, 병원에 가지 않았다. 20여 년이 넘게 흐르고서야 입원했다. 이후 마사코에게 맞는 약(의사 혹은 가족의 입장에서)을 찾았고, 석 달 뒤 퇴원했다. 마사코는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고 옷차림도 단정해졌다.
감독 역시 방한 인터뷰에서 치료 이후 마사코와 대화할 수 있게 된 변화가 영화를 만들게 된 출발점이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서사가 완성된다.
‘발병 → 치료받지 않음 → 악화 → 뒤늦은 치료 → 호전’에 이르는 이 서사를 따라가면 답은 ‘더 일찍 치료했어야 했다’로 치우치게 된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어떻게 해야 했을까?』라는 질문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된다.
이미 정답을 가지고 있다면 왜 질문하는가. 영화가 말하는 ‘어떻게’의 답이 결국 ‘더 빨리 정신질환임을 인정하고 병원에 데려갔어야 한다’로 수렴한다면, 제목의 물음표는 질문이라기보다 이미 가진 정답을 확인받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감독은 본인이 부모보다 마사코를 더 위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도 이어 따라온다.
물론 필요한 의료적 지원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약물과 병원이 필요할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많은 가능성 가운데 하나의 선택지가 아니라, 마사코의 지나간 삶 전체를 설명하는 유일한 정답인 것과 같이 그려지는 영화의 메시지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조기 개입했어야 했는가? 마사코에게 정신의학은 너무 늦게 개입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족과 사회는 마사코의 삶에 너무 일찍부터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8월 22일의 공동체 상영회 GV에서 정신과 전문의인 유기훈 교수는 정신의학적 조기 개입 외의 다른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그는 마사코의 죽음 뒤 아버지가 공동 작업하던 논문을 관에 넣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고 이야기하며, 마사코에게 “논문을 쓰지 못해도 괜찮다”, “훌륭한 의사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지원이 있었다면 어땠을지 논했다. 하나의 길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가능성과 선택지를 확보하는 것 또한 국가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마사코에게 너무 늦었던 것은 조기의 진단과 치료만이 아니었다. 아, 앞 문장은 틀렸다. 마사코에게 어느 누구도 다른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마사코의 방식으로 타인과 연결될 가능성을 제시하지 않았으니 다른 방식은 늦은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마사코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누구도 묻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 라고 묻기 전에]
감독은 한국을 두 차례 찾았다. 한국에서도 이 영화를 둘러싸고 많은 GV가 열렸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비롯한 영화계 사람들이 모여 영화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런데도 정신장애 당사자단체인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비롯한 여러 단체—(사)대한정신장애인가족협회, 경기우리도,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송파정신장애동료지원센터, 한국정신장애인연합회, 해방정신보건연구회—가 직접 공동체 상영회를 준비한 이유는 단순했다. 정신장애 당사자의 영화인데 이상하게도 당사자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의 GV에서는 당사자와 가족, 정신과 의사와 변호사가 함께 앉았다.
감독의 물음에 답하기 이전에 감독에게 묻고 싶다.
한국을 두 번이나 오가며 당신은 한국의 마사코들을 만나보았는가. 마사코에 관한 이야기를 정신과 의사와 영화계 전문가와 나누기 이전에, 마사코와 비슷한 경험을 살아온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려 한 적이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은 누나의 입장에 진정으로 서보려고 했는가.
이 질문은 감독을 비난하기 위해 던지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감독 역시 20년 동안,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왔을 것이다. 영화를 만들면서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고 부모를 의심하고 자신까지 의심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본 당사자로서 나는 감독이 던진 질문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감독은 ‘어떻게 했어야 제일 좋았을지’에 대해 아버지에게 묻는다. 그 장면에서 나는 저 질문의 대상은 아버지가 아니라 마사코여야 했다는 생각을 반복했다. 영화 속 가족도, 관객의 대다수도 마사코에게 어떻게 해야 했을지 고민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사코에게 어떻게 하고 싶은지를 묻는 사람은 없다.
글을 쓰고 보니 ‘이상하다’라는 말을 유난히 많이 썼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계속 그 말로 돌아오게 된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이상함을 이야기하고 싶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라는 질문은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인가. 질문의 문법부터 이상하다. 가족이 마사코에게 무엇을 해야 했는가. 의사가 마사코에게 무엇을 해야 했는가. 사회가 마사코에게 무엇을 해야 했는가. 마사코는 언제나 누군가가 ‘무엇을 해야 하는’ 대상의 자리에 놓인다. 하지만 정신질환 및 정신장애 당사자 역시 다른 누구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선택하고, 실패하고, 후회하고, 이상한 선택마저 할 권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마사코는 어떻게 했어야만 하는 ‘대상’으로 이해되는가.
끝으로,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이 영화와 영화를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는 마사코를 ‘조현병을 가진 사람’으로 호명한다.
한 사람의 삶과 언어, 감각과 관계가 ‘조현병’이라는 하나의 진단으로 너무 쉽게 설명되지 않기를 바란다.
조현병은 정신질환을 이야기할 때 유독 대표처럼 소환되는 진단명이다. 당사자의 위험, 강제 입원, 치료, 약물, 조기 개입을 이야기할 때도 가장 먼저 등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보면 정신적 고통과 독특한 경험의 세계 전체가 마치 조현병 하나인 것처럼 좁혀질 수 있다. 다른 진단명을 부여받고 살아가는 사람들, 특정 진단명으로 설명되지 않는 경험을 하는 사람들, 아직 어떤 이름도 가지지 않은 상태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뒤로 쉽게 밀려난다.
그렇기에 ‘마사코’라는 한 사람의 일대기가 조현병이라는 이름에 모두 흡수되지 않았으면 한다. 또한 마사코를 이야기한다는 이유로 또 다른 누군가의 경험이 보이지 않게 되지 않았으면 한다. 사람을 분류해 내기 위해 붙인 진단명이 그 사람보다 커지는 순간, 우리는 또다시 어떤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얻게 될지 모른다.
결국 내가 이 영화를 보고 가장 오래 붙들고 있는 질문은 영화의 제목과는 다르다.
마사코에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가 아니라, 마사코는 어떻게 하고 싶었을까. 이 질문을 충분히 묻는 것, 답을 기다리는 것, 침묵 또한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먼저였다면 조금 달라지지는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