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구르는 기술

함께 구르는 기술 | 2023 | 댄스필름 | 29분 51초 | 연출 콜렉티브 데구루루
시놉시스
나이와 성별 장애 등 차이를 드러내 놓고 함께 구르기로 약속한 사람들이 있다. 서로의 경계를 뚫고 필연적으로 타인의 신체를 침범하는 위험한 놀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용기를 낸 사람들.
제한된 시간 안에서 함께 구르는 기술을 성취하기 위해서 탐색이 시작된다. 호기심과 약간의 믿음을 가지고 서로의 몸에 기댄다. 머뭇거림과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 가운데 서로가 상상한 구르기를 성취하기 위해서 타협과 조율을 시도하지만, 삐거덕 거리는 몸들이 파열음을 낸다. 서로의 몸에 기댄 채로 서로를 지지하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그것은 곧 제약이 된다. 둥근 공처럼 매끈하게 구르는 것은 실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덩어리진 몸들의 엇박자는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키며 덜커덩! 쿵! 쾅! 철퍼덕! 굴러간다.
인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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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영교(22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집행위원)
골목을 구른다. 편의점 바닥을 구른다. 두루마리 휴지를 안고 구른다. 도로를 구른다. 사무실 바닥을 구른다. 방바닥을 구른다. 공원을 구른다. 구르고 또 구른다. 직립보행의 유구한 역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문명 속에서 ‘구르는 몸’의 보행술은 의아하다. 누군가는 ‘으악’하며 빤히 쳐다보거나, 마주치길 피한다. 도대체 저건 뭐야?
영화는 댄스플로어가 깔린 평평한 공연장으로 이동한다. ‘보통이 아닌 몸’들이 함께 구르기 위해 갖가지 체위들을 수행한다. 허리를 비틀고, 어깨를 곱치고, 다리를 버둥댄다. 함께 구르기 위한 갖가지 힘들이 실험된다. 상대의 손목을 쥐는 ‘악력’을 조절하고, 상대의 발목을 잡고 구르는 ‘원심력’을 가늠하고, 상대와 떨어지지 않기 위한 ‘중력’을 지속하기 위한 체위를 연마한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건데?
당혹스러울 것이다.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이런 몸짓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별 말 없이 이어지는 24분간 구르기만 하는 이 영화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일은 곤혹스러울 것이다. 이해하려 들수록 논리적 궁지 속으로 내몰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며 피부 아래로 굴러 들어오는 추상적인 ‘그 느낌’. 뚜렷한 단서 하나 없이 구르고 또 구르는 8명의 배우들이 정상/비정상을 가르는 경계선을 건드리는 ‘그 느낌’은 몸 안쪽 깊은 곳으로 치민다. 당혹과 곤혹을 불러일으키는 ‘그 느낌들’이 어기어디어차 노래 부르며 당돌하게 굴러온다. 구르며 횡단하는 ‘그 느낌’은 하나의 통일적 질서를 부여하는 비장애신체중심의 감각에 정전기를 일으킨다. 저마다 고유한 몸들과 함께 공통의 세계를 구르며 나아가려 할 때, 그 때, “상상된 구체성으로부터 갈수록 미세한 추상”(칼 마르크스)으로 관객을 이끈다.
철학자 칼 마르크스는 인간이 추상력을 가동시키려면 추상이 가능한 조건이 역사적으로 갖추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즉 ‘볼’ 수 없었던 추상적인 것들을 ‘볼’ 수 있으려면 고차원적인 지성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 영화를 장애인’인권’영화제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은 진보적 장애해방운동이 한국사회를 굴리며 쌓아온 역사성 속에서 마침내 보이게 된 영화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한강대교를 구르며 기어가고, 청와대를 향해 구르고, 전국을 돌며 기고, 지하철 역사에서 구르고, 지하철 객실을 기어가며, 함께 몸 딪고 살아가는 이 땅에 ‘함께 이동할 권리’의 역사를 굴려왔다. 함께 지면을 공유하는 평평한 공동체를 상상하며, 20년을 넘게 지역사회에서 ‘함께 이동하는 기술’을 요구하며, 처절하게 굴렀다. 팔꿈치가 까지고, 무릎이 작살나고, 허리를 삐끗하며 역사를 굴려왔다. 울퉁불퉁한 우리 사회의 지면을 함께 구르기 위해 우리에게 요청되는 감각은 동정과 시혜가 아니라고, 차별과 혐오가 아니라고 외치며 구르고 구르며 물어왔다. 울퉁불퉁한 세계를 “함께 구르는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 작살나는 몸, 삐끗한 B급의 몸들이 겪는 사회적 통각에 대한 추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아우성의 시좌’로 역사를 굴려왔다.
영화의 후반부는 𝅗𝅥어기어디여차 어기어디여차 뱃놀이 가자𝅘𝅥𝅮 는 노래를 굴리는 찌그러진 아우성이 가득하다. 목소리가 되지 못한 짓눌린 숨, 덜컥이는 숨, 간지러운 숨, 기어코 굴리겠다는 숨, 빠그라진 숨, 숨들의 아우성이 𝅗𝅥행진 행진 앞으로 행진 하는거야𝅘𝅥𝅮 노래를 굴린다. 노래와 아우성을 뚫고 마침내 목소리 하나가 솟는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로 가봅시다!” 솟아오른 목소리를 굴리는 몸들 사이로 삐져나오는 목소리를 가진 아우성이 있다. “멈춰. 멈춰. 그만해. 왜 계속하는거야.” 노래하던 목소리는 응답한다.
“덜 왔어.”
계속해서 구르기만 하는 영화가 끝나고, 어디를 향해 구를 것인가? 함께 구르기를 제약하는 것은 무엇인가? 누가 어디에서 구르기를 해석하는가? 우리는 함께 구르며 이동하기 위해 어떤 감각적인 역량을 도모해야 하는가? 생각하기 전에, 이해하려고 하기 전에, 몸 구석구석에 미세하게 맴도는 당혹스럽고 곤혹스러운 ‘그 느낌’에 잠시 머물러 있기를. ‘그 느낌’ 속에서 마주치게 될 해방의 추상력을 발휘하여, 다함께 이동하는 기술을 구체적으로 상상해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제작진 소개
연출 | 김윤진 | 기획 | 최봉민 |
제작 | 콜렉티브 데구루루 X 펠든크라이스 무브 | 각본 | |
촬영 | 보링스튜디오 | 편집 | 보링스튜디오 |
녹음 | 보링스튜디오 | 기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