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비를 맞으며

같이 비를 맞으며 | 2022 | 다큐 | 00:35:00 | 연출 김설해
시놉시스
대우조선해양의 하청 노동자들이 힘들고 위험한 작업장, 낮은 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견뎌온 오랜 시간 동안 잃었던 권리를 찾기 위해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2022년, 조선소 경기가 호전되어도 몇 년째 삭감된 임금은 오르지 않자, 노동자들은 임금 복원을 위한 30% 인상과 단체협약 체결을 요구하며 파업 투쟁을 벌인다. 구사대의 폭력과 정부의 강한 압박에도 자신들 없이는 생산도 없다며 일터 곳곳에 단단히 자리한다. 도크를 지키고 서로를 지키며 세상을 향해 이대로 살 순 없지 않겠는가 묻던 그이들, 각자의 삶의 자리를 지키며 51일간 투쟁을 이어온 노동자들의 이야기. 삶이 이어지듯 싸움도 이어진다.
인권평
조선소 하청노동자 투쟁, 함께 맞는 비 <같이 비를 맞으며>
-하민지(비마이너 기자, 옥바라지선교센터 운영위원장)
‘비 내리는 장면이 등장하는 영화는?’ 대다수의 관객이 한두 작품쯤은 쉽게 대답할 것이다. 나는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먼저 떠오른다. 사랑하는 이를 집에 데려다 주고 비 맞으며 탭댄스 추는 돈 락우드(<사랑은 비를 타고> 1954), 쇼생크교도소에서 탈출한 후 비 맞는 앤디 듀프레인(<쇼생크탈출> 1995). 지혜와 상민이 재킷 하나를 우산 삼아 빗속을 뛰어가는 장면도 떠오른다. ‘너에게 난’으로 시작하는 배경음악이 자동재생된다(<클래식> 2003).
이처럼 영화에서 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여러 감정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오브제로 기능한다. 영화뿐만이 아니다. 음악, 문학,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이 비를 매개 삼아 메시지를 전달하고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기도 한다. 또한 비의 이미지는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성을 갖고 있어서 언어와 문화, 세대가 달라도 이해할 수 있다. 공포영화에서 내리는 비와 로맨스영화에서 내리는 비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관객은 드물 것 같다.
김설해 감독의 <같이 비를 맞으며(2022)>에서 비는 고통, 고난의 의미를 지닌다. ‘같이 비를 맞는다’는 건 고통을 함께 견딘다는 뜻이다. 고통을 견디는 사람들은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과 희망버스를 타고 경상남도 거제시 옥포조선소로 간 사람들이다. 이들은 하청노동자의 임금을 삭감하는 원청 대우조선해양과 대우조선해양의 실질적 소유주인 KDB산업은행에 맞서 51일간 투쟁을 전개했다.
비 맞는 사람들
영화의 서사는 ‘민주노총 금속노조 경남지부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조합원들이 이끌어간다. 감독은 조합원들을 인터뷰한 장면을 병렬적으로 이어 51일간의 투쟁서사를 풀어냈다.
특이했던 것은 유최안 부지회장의 인터뷰가 없었다는 점이다. 유 부지회장은 옥포조선소 1도크 바닥에 0.3평 철창을 만들어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투쟁한 사람이다. 좁은 철창 안에 구겨져 있던 몸과 그럼에도 결의에 찬 눈빛이 담긴 사진 한 장은 많은 사람을 희망버스에 타게 했다. 언론도 이 철창을 앞다퉈 보도했다. 그런데 영화에서 유 부지회장의 말은 딱 한 마디 나온다. “고맙다.” 22개 하청업체 대표와 노조의 잠정합의안이 도출된 후 철창 밖으로 나오면서 한 말이다.
영화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인터뷰이들, 즉 노조 조합원이자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유 부지회장과 함께 비 맞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조선소에서 고공농성을 했고, KDB산업은행 앞에서 단식농성을 했으며, 조선소 안팎으로 농성자들을 지원하고 지켰다. 2022년 뜨거웠던 여름, 원청에 맞서 51간의 투쟁을 전개한 하청노동자 당사자들이다. 언론에서는 철창 안에 스스로를 가둔 유 부지회장을 중점적으로 다뤘으나 영화는 같이 비 맞은 다른 노동자의 면면을 고루 주목했다.
영화에선 노동자들이 비 맞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비의 이미지 자체보다는 비를 ‘같이 맞는다’는 행위의 의미가 더 중요하게 드러난다. 오프닝에서 하청노동자들이 하나의 우산을 함께 쓰고 투쟁하러 조선소로 들어가는 장면, KDB산업은행 앞 결의대회 중 비가 와서 온몸이 다 젖어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장면 등이 인상 깊다. 카메라는 비에 젖은 하청노동자의 다양한 모습을 비춘다. 길 웅덩이에 고인 빗물을 자박자박 밟고 지나가는 작업화, 푹 젖어 다 찢어진 피켓을 꼭 붙든 손, 비가 흐르는 아스팔트 위에 단단히 주저앉아 있는 다리. 비는 명사지만 이런 장면에선 동사로 느껴진다. ‘비오다’, ‘비맞다’라는 단어가 있는 것만 같다.
함께 맞는 비
고 신영복 선생은 감옥에 있던 1983년, ‘함께 맞는 비’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 2018년, 건물주의 횡포로 쫓겨난 서촌 궁중족발 윤경자 사장은 투쟁하는 이들에게 이런 편지를 쓴 적이 있다. “함께 비를 맞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영복 선생과 윤경자 사장 ‘함께 비를 맞다’는 관용구를 ‘연대’의 의미로 썼다.
영화에서도 이 같은 의미가 계속 등장한다. 파워공인 박성현 조합원은 수많은 연대자가 조선소를 방문하고 옥포 시내를 행진하며 투쟁할 때 “연대의 힘을 처음 느꼈다”고 말했다. 고공농성을 했던 이학수 조합원은 “1년 전만 해도 노조에 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많이 늘어서 현장이 더 활기찰 것 같다”는 기대감을 내비쳤다. 노동자들은 같이 비 맞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더 강고하게 싸울 수 있다는 걸 온몸으로 느낀 듯 보였다.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노조는 임금 30% 인상을 요구했지만 하청업체들이 고작 4.5% 인상안을 제시했다. 노조는 이 안을 받아들이고 잠정 합의한 상태다. 원청인 대우조선해양은 노조에 470억 원 손배소를 제기한 것도 모자라 하청노동자 67명을 업무방해로 무더기 고소한 상태다. 조합원들은 잠정 합의 후 노조법 2, 3조 개정 투쟁에 결합했다. 발판공 나윤옥 조합원은 “100% 이기고 만족하는 싸움을 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관객 여러분께서 끝나지 않은 하청노동자 투쟁에 연대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100% 이기는 싸움”을 할 수 있도록 같이 비를 맞아주시길 바란다.
제작진 소개
연출 | 김설해 | 기획 | |
제작 | 각본 | ||
촬영 |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김설해, 정종민 외 | 편집 | 김설해 |
녹음 | 기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