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에 꼬리를 무는 열사 이야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열사 이야기 | 2023 | 극 | 00:41:26 | 연출 양준서 | 제작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 인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 지오필름, 원테이크소울
시놉시스
2006년 6월 2일. 한 사람의 삶이 지하철 역사 아래로 사라진다.
세상은 그의 죽음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많은 동지들의 가슴에 큰 불씨를 남겼다.
그를 죽음으로 이끈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왜 우리에게 불씨로 남아있을까?
한 장애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무엇일지..
여기,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인권평
‘돌림노래’는 계속되어야 한다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열사 이야기>
-홍성훈(1인 창작자, 21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위원)
작년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을 촉구하는 지하철 선전전에 몇 번 참가한 적이 있었다. 나는 지하철 선전전에 나서는 날이면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갔다. 시민들의 시선을 회피하기 위한 나름의 자구책이었다.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마치 내가 대단한 투사라도 되는 것처럼 투쟁의 정당성을 이야기하곤 하지만 정작 시민들 앞에 나설 때면 두렵고 떨렸다. 그 시민들의 눈에는 내가 한낱 출근길 지하철을 멈추는, 그저 ‘세금만 축내는 인간’(이 표현은 내가 지하철 선전전에 나간 날 어떤 시민에게 들은 표현이다)으로만 보이고 고정될까 하는 두려움에서였다. 지하철 선전전에서 나는 시민들에게 ‘장면’에 지나지 않았을까, 아니면 한 번이라도 살아 움직이는 시민으로 보였을까? 아마 이 고민은 어쩌면 평생을 해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했을까? 생애 마지막 발자취를 지하철 승강장에 남기고 간 박기연 열사 말이다. 생애 끝에서 박기연 열사가 한 결단은 하나의 의미만을 주지 않는다. 그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렸다. 양준서 감독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열사 이야기>는 그 해석의 일환이다. 영화는 기존 지상파에서 방영되고 있는 동명의 예능 프로그램의 형식을 따른다. 두 명의 이야기꾼과 두 명의 이야기 손님이 나와서 박기연의 이야기를 나눈다. 지면의 한계상 영화에서 나오는 박기연의 모든 이야기를 다룰 순 없지만, 박기연은 90년대 후반 무렵부터 인천 지역에서 전동휠체어를 먼저 탄 중증장애인 당사자이자 인천 장애인 당사자들의 풀뿌리 조직을 일구어나간 활동가였다. 2000년대 진보적 장애인 운동의 태동이었던 이동권 투쟁을 인천 지역에서도 이어나갔고 투쟁 현장 어디에서나 있었다. 그와 삶을 함께한 동지들은 그를 든든한 맏형이었다고 술회한다. 언어장애가 있어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 많은 품이 들었지만, 존재 자체로 믿음을 주는 사람이었다.
한편으로 그는 남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활동지원서비스가 부재하던 시절이었다. 박기연이 외출을 하려면 늙은 아버지의 등에 업혀 현관 계단을 내려가야 했고 화장실을 가려면 옆 사람에게 부탁해야 했다. 그 시절 장애인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려면 염치는 저 밑바닥에 숨겨야 했다. 결국 그의 선택은 남에게 부탁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바깥에서 활동할 때면 되도록 물을 먹지 않았고, 화장실을 거의 가지 않았다. 장애인의 권리운동을 하기 위해 자신의 존엄을 최소화해야 했던 아이러니. 그 앞에서 그는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나로서는 상상이 잘 되진 않는다.
2006년 6월 2일 오전 박기연은 자신이 활동하던 인천뇌병변장애인협의회 사무실에 들러 “너무 힘들다.”, “나, 오늘 죽으러 간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날따라 사무실은 분주했으며, 사람들은 그의 말을 새겨듣지 않았고, 으레 하는 말이려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박기연은 사무실을 나갔고 잠시 뒤 결의에 찬 눈빛으로 돌아왔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눈빛이었다. 그는 전동휠체어를 이끌고 평소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용했던 재물포역이 아닌 반대 방향에 있는 간석역으로 갔다. 그리고 간석역을 향해 들어오는 열차에 뛰어들었다.
동료들과 주변 사람들은 그가 왜 자발적인 죽음을 택했는지 알 수 없었다. 동료들은 베일에 싸여 있는 죽음의 이유를 파고들기보단 박기연이 남긴 여백, 즉 박기연이 바랐던 장애인의 존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 투쟁’을 시작했고, 그 결과 인천시의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를 이끌어냈다. 박기연은 비록 짧은 말을 남기고 생을 마쳤지만, 남은 이들은 그가 못 다 한 말을 추측하며 세상을 바꾸기 위한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기에 오늘날까지도 활동가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박기연이 꿈꾸었던 세상의 이야기는 매일 아침 지하철 선전전에서 매번 다른 이들의 목소리로 이어지고 돌림노래가 된다. 그리고 노래는 투쟁하는 장애인, 비장애인 활동가들과 연대하는 시민들을 구체적인 목소리를 가진 존재로 변화시킨다. 박기연 열사의 삶이 담긴 『유언을 만난 세계』의 구절을 읽어가며 우리의 투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당당하게 선포한다. 열사를 기억하고 이야기를 하는 한 열사는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당신도 그 노래를 언젠가 따라부를 수 있기를 작게나마 소망해본다.
제작진 소개
연출 | 양준서 | 기획 | 양준호(총괄/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 |
제작 |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 인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 지오필름, 원테이크소울 | 각본 | 이동언(인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 |
촬영 | 양준서(지오필름), 최세웅(원테이크소울) | 편집 | 양준서(지오필름) |
녹음 | 기타 |